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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November 7, 2026

권력을 자신으로 착각 말라…‘리어왕’이라는 반면교사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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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와 자신을 하나로 여겨온 사람에게 자리를 잃는 일은 자신을 잃는 일이다. 사진은 한 노인이 집에 홀로 앉아 있는 모습. 게티이미지뱅크
자리와 자신을 하나로 여겨온 사람에게 자리를 잃는 일은 자신을 잃는 일이다. 사진은 한 노인이 집에 홀로 앉아 있는 모습.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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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 한 대학병원에서 겪은 일이다. 뇌 질환 환자들이 입원한 병실에서 아버지 곁을 지키던 주말, 맞은편 침상의 노인을 돌보던 남성의 말이 귀에 흘러들어왔다.

그는 수시로 “아빠, 사랑해요”라고 속삭였고 “아유, 잘생긴 우리 아빠, 허장강 닮았네, 아들한테도 잘생겼다고 해줘봐요, 나 예쁘잖아. 응?” 하면서 계속 낯간지러운 아양을 떨었다. 속으로 ‘뭐 저렇게까지…’와 ‘나보다 훨씬 낫네’ 사이를 오락가락하다 관심을 끄려 할 즈음, 이어지는 말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아빠, 이따가 ○○가 오면 이렇게 하셔야 해요. 너는 형 것을 욕심내지 마라, 이렇게 말씀하셔야 해요. 아셨죠? 아빠 것은 다 형 것이고 형 것은 네가 욕심내지 마라, 이렇게요. 자, 나 따라서 말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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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가 흐려져 아들이 주입한 대사를 읊어야 할 처지에 놓인 노인이 딱했다. 그가 시키는 대로 말한들 다른 아들은 순순히 물러설 것인가. 알 수 없는 일이다.

부모의 유산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혈연관계의 분쟁과 배신, 비극은 동서고금 마르지 않는 이야기의 씨앗이다. 그 방면으로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아마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이 아닐까. 사랑의 말을 대가로 아버지 재산을 독차지하려는 병실의 아들과 달리, ‘리어왕’은 왕국을 물려주는 대가로 딸들에게 사랑의 말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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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십 줄에 들어선 리어왕은 왕국을 셋으로 나눠 “노년의 걱정거리를 딸들에게 넘기고 가벼운 마음으로 죽음을 향해 천천히 기어갈 결심”을 굳혔다면서 세 딸에게 누가 나를 가장 사랑하느냐고 묻는다. “효성과 자격을 갖춰 요구하는 딸”에게 상응하는 몫을 주려는 의도에서다. 큰딸과 둘째 딸은 온갖 감언이설을 늘어놓으며 왕국을 물려받는 데에 성공하지만, 막내딸 코델리아는 할 말이 없다며 아첨을 거부하다 쫓겨나고 만다.

사실 나는 젊은 시절에 ‘리어왕’을 펼쳤다가 1막 1장에 걸려 끝까지 읽기를 포기한 적이 있다. 사랑을 말로 입증하면 왕국을 물려주겠다니, 황당한 발상이 아닌가. 자기 자식을 얼마나 모르면 저럴까. 게다가 아첨을 거부한 코델리아에게 리어왕이 퍼붓는 독설은 또 어찌나 살벌한지. 고전 명작이지만 이 어리석고 거친 왕의 행보를 더 따라갈 마음이 생기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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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든 뒤 다시 펼친 ‘리어왕’은 다르게 읽혔다. 사랑의 크기를 말해보라는 리어왕의 요구는 말을 통해 사랑을 확인하겠다는 순진한 발상이 아니라 복종의 요구다. 자신이 거의 신과 같은 존재이자 모든 사람을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살아온 리어왕이 사랑을 말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사실상 복종의 명령이며, 이에 응하지 않는 것은 반역이다. 권력과 자신을 쉽게 동일시하는 인간의 행태를 알고 난 뒤에야 “나는 전하를 도리에 따라 사랑할 뿐 더도 덜도 아니다”라는 코델리아의 대답에 리어왕이 왜 그토록 분노하는지 비로소 이해됐다.

리어 왕 l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민음사(2005)
리어 왕 l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민음사(2005)

‘리어왕’은 권력과 자신을 분리해서 바라볼 줄 몰랐던 사람이 권력을 잃어버린 뒤에 벌어지는 장대한 비극이다. 권력을 지녔기에 가능했던 통제권은 리어왕이 누구인지를 말해주는 정체성의 핵심이었지만, 권력을 잃고 겉치레가 무자비하게 벗겨진 뒤 그는 초라한 노인일 뿐이다. 둘째 딸은 아첨으로 왕국을 받아내자마자 “아버지는 자신을 조금밖엔 알지 못했다”고 말한다. 자신의 힘을 곧 자기 자신이라고 착각하는 리어왕을 비웃는 셈이다.

리어가 자기 힘의 원천, 복종의 이유를 의심해볼 줄 아는 왕이었다면 딸들에게 박대받고 들판을 헤매며 미쳐가는 처지에 내몰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리와 자신을 하나로 여겨온 사람에게 자리를 잃는 일은 자신을 잃는 일이다.

노년을 향해가는 사람에게 ‘리어왕’은 풍성한 반면교사의 텍스트다. 큰딸과 둘째 딸이 리어에게 기사 수행단을 없애라고 다그치고 누가 모실지 옥신각신하는 모습에선 현실에서 숱하게 일어나는 부모 돌봄의 갈등을 떠올리게도 된다. 리어는 실체 없는 권위와 복종받을 권리만을 붙든 채 모든 것을 다 내어주었으나 거꾸로 해야 했다. 스스로 설 수 있는 최소한의 근거지는 확보하되 ‘왕’이라는 지위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마음, 사랑과 복종을 요구하고 통제하려는 마음은 내려놓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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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어는 모든 것을 빼앗긴 뒤에야 그 마음을 내려놓는다. 폭풍이 몰아치는 들판을 헤매면서 그제야 비로소 자신이 통치했던 왕국의 헐벗은 사람들에게 마음이 가닿고, 다시 만난 코델리아 앞에서 “나는 어리석고 멍청한 노인”이라고 고백한다.

병실에서 탐욕스러운 아들의 간계를 목격한 경험이 ‘리어왕’과 겹쳐 떠오른 것은 그 아들과 1막 1장의 리어왕이 방향은 달라도 서로 비슷해 보여서였다. 파렴치한 아들은 늙고 무력한 아버지에게 따라 할 대사를 불러주었고 독선적인 리어왕은 딸들에게 사랑의 대사를 요구했다. 두 경우 다 원하는 대사는 정해져 있고 상대에게 요구하는 것은 ‘해야 할 말’을 하라는 것이다. 이를 거부한 사람은 코델리아뿐이었다.

지위나 체면, 권력 그 어느 것에도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이 시키는 말을 하지 않아도 되고 다른 사람에게 사랑의 말을 요구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 느낀 그대로, 자기의 말을 할 수 있는 상태가 나이 들어서도 지켜야 할 존엄의 한 모습이 아닐까. 딸들에게 사랑의 말을 요구하며 시작하는 ‘리어왕’은 숱한 사람들이 죽는 비극이 휩쓸고 지나간 뒤 생존자인 에드거의 다음과 같은 말로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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