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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day, October 12, 2026

[춘추정병시대] “팽이처럼 의미 없이 돌기만 해”···‘저궤도 청년’ 10년 추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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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바둑을 두던 인공지능이 음악을 만들고 소설을 쓴다. 그사이 코로나19 팬데믹이 전 세계를 휩쓸고 지나갔다. 10년, 강산 정도가 아니라 세상이 변했다. 이 격동의 초입에서 스무 살을 맞았던 청년은 어느덧 서른이 됐다.

“어렸을 땐 서른 살이 아저씨인 줄로만 알았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젊을 수가 없어요.” 10년 만에 다시 만난 권동현(가명)이 멋쩍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배달라이더인 그가 열아홉에 세운 ‘인생 계획’을 이야기하던 참이었다. 그 경로대로라면 이미 직업군인이 돼 가정을 꾸렸어야 한다. “계획대로 된 게 없네요. 단 한 개도.” 동현은 학창 시절 가고 싶다고 노래하던 일본 여행도 아직 가보지 못했다.

경향신문은 2016년 보도한 창간 70주년 기획 <부들부들 청년> 기사에서 강원도 강릉의 A특성화고 3학년 학생들의 이야기를 전했다. 이들은 자신을 ‘노답’(답이 없음)이라고, ‘똥 만드는 기계’라고 자조했다. 그러면서도 내심 ‘10년 뒤엔 자리를 잡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품었다. 경향신문은 그로부터 10년이 흘러 강릉, 원주, 구미, 서울 등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졸업생 8명을 수소문 끝에 다시 만났다. 졸업 후 각자의 길을 걸어온 이들은 회사원, 음식점 사장, 프로그래머 등이 돼 성실하게 밥벌이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본질적인 고민은 10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했다. 지금도 하고 싶은 일을 찾지 못하고, 반복되는 업무와 일상에 무기력함을 느낀다. 고향에는 여전히 제대로 된 일자리가 많지 않으며, 이따금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휴대전화 판매점에서 일하는 이정호(가명)는 “중학교 때가 인생의 전성기”라고 말했다.

세상은 거대한 변화를 겪었는데 이들이 마주한 현실은 특별히 달라진 게 없다. 사회의 일원으로 ‘1인분’을 하고 있지만 세상에 필요한 존재라는 감각이 희미하다. 대학에 가지 않은, 더 좋은 대학에 가지 못한, 이른바 ‘정상 궤도’에서 이탈한 자의 노력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제값을 받기 어렵다. 사회의 ‘잣대’대로 열심히 살지 않았기 때문일까. 조명받지 못한 청년의 삶을 비춘다. 어쩌면 흔한 이야기일 것이다.

서른이지만 열아홉입니다

당시 A고 3학년생으로 만나 인터뷰했던 황준영(가명)은 현재 강릉에서 족발집을 운영한다. 매출은 월 6000만~7000만원을 찍는다. 직장인으로 따지면 ‘억대 연봉자’다. 하지만 자신을 쓸모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10년 전에도 그랬다. 준영은 자신을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물건”이라고 표현하는 학생이었다. 스물의 문턱에서 먹고사는 문제를 걱정하던 준영은 현재 수입 등 물질적 지표로 보면 분명 다음 단계로 나아갔다.

하지만 준영의 세상은 열아홉 부근에 멈춰 있다. 또래보다 많은 돈을 벌지만 만족스러운 인생은 아니다. “지금 인생도 멋지다”는 말에 준영은 “공부해서 대학 한 번 가보고 싶다”고 했다. 지금 이 상태로 행복해지려면 100억원은 있어야 한다고 본다. 대학 졸업장이 100억원의 값어치는 한다는 얘기처럼 들렸다. 준영이 생각하는 쓸모 있는 존재는 공무원처럼 “나랏일” 하는 사람이다.

고등학생 때 수업을 버텼다면, 지금은 영업이 끝나기만을 기다린다. 밤 10시쯤 퇴근하면 고교 친구들과 PC방에 가 새벽까지 게임을 한다. 일주일에 딱 하루 있는 휴일에는 오토바이를 타고 바람을 쐬러 나간다. 가장 멀리 간 곳이 20~30분이면 닿을 수 있는 정동진이다.

동현은 곧잘 ‘새로 고침’ 되는 경력 탓에 ‘정착’이라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못했다. 대학 대신 취업을 택했지만 경력이 쌓이는 일자리는 그리 많지 않았다. 동현은 타이어 가게, 횟집, 휴대전화 판매점 등 7곳의 직장을 거치는 동안 어느 곳에도 정착하지 못했다.

그것이 동현이 허투루 살았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는 10년 전 현장실습 때도 2층 침대 8개를 두고 16명이 묵는 컨테이너 기숙사에서 하루 12시간씩 맞교대를 하며 악착같이 버텼다. 어디서나 일을 잘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보상이 아니라 더 많은 일이 돌아올 뿐이었다. 동현은 현재는 배달 일에 정착했다. 오전 11시에 나와 다음날 새벽 1~2시까지 배달을 하면서 성수기엔 한 달 700만원도 벌어봤다. 때마다 단가가 떨어지고 있지만 일한 만큼 보상을 주니 이만한 일도 없다고 생각한다.

어려서 부모가 이혼하고 할머니 손에서 자란 동현의 다음 단계는 가정을 꾸리는 것이다. 장난처럼 결혼 얘기를 꺼낼 때마다 같이 사는 여자친구는 “우리 집 있어? 뭐 있어?”라며 정색한다. 동현은 “‘우리’라는 게 사실 ‘너 뭐가 있냐’라는 뜻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에게 좋은 인생의 모습이 “집 있고, 차 있고”가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다.

노는 시간도 아까운 동현은 주 7일 일하며 “시간을 녹이”고 있다. 그래도 “근로소득으로 부자? 절대 못 된다”는 생각을 한다. 그의 선택은 주식이다. 배달하다 전치 12주 사고를 당하고 받은 목숨값, 도로에서 시간을 녹이며 받은 일당을 모두 주식에 태웠다. “그래도 다섯 번 하면 한 번은 이기게 해줬다 말이에요!” 한때는 하루 오토바이를 타는 것보다 훨씬 많은 돈을 벌어다 줬는데, 지금은 날린 돈만 1억원이 넘는다. “도파민에 뇌가 녹았다.” 그 역시 도박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무기력한 하루를 달래줄 유일한 해방구에서 벗어날 자신이 없다.

정호의 하루는 일과가 끝나면 모든 것이 초기 상태로 되돌아간다. 다음 단계를 기대할 것이 없다. 어제 휴대전화 10대를 팔았더라도 오늘 1대도 팔지 못하면 슬슬 불안해진다. 이틀 연속 판매 실적을 올리지 못하면 대표가 만든 단체 채팅방에 초대돼 영업 전화를 어떻게 돌렸는지 보고해야 한다. “지옥”이다. 정호는 지금도 진로에 관한 물음 앞에 멈춰 서 있다. 그는 “고등학교 때도 지금도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의 취미는 혼술이다. 퇴근 후 매일 소주를 마신 뒤 밤 10시쯤 잠자리에 든다. 다음날 오전 8시40분 알람 소리를 듣고 눈을 뜨면 또 ‘제로베이스’다.

경향신문이 2016년 창간70주년 기획으로 보도한 <부들부들 청년> 지면 기사. 사진 크게보기

경향신문이 2016년 창간70주년 기획으로 보도한 <부들부들 청년> 지면 기사.

방치게임이 남긴 것

가정은 사회적 규율을 전수하는 최초의 공간이다. 그런데 어떤 가정에서는 규율이 전수되지 않는다.

반도체 부품회사에 다니는 윤태민(가명)은 계급사회인 군대에 가서야 지각하는 버릇을 겨우 고쳤다. 아침잠을 이겨내지 못한 학창 시절에는 지각을 밥 먹듯이 했다. 농산물 유통업을 하던 부모는 태민의 머리맡에 용돈을 놔두고 이른 아침 일을 나갔다. 태민은 부모로부터 받은 돌봄에 관한 질문에 “그냥 두면 알아서 사냥하는 방치게임 같았다”고 말했다.

태민만이 아니다. 7년 넘게 직장 생활을 한 주영준(가명)은 지각하는 버릇을 1년 전쯤에야 겨우 고쳤다. 동현이 배달 기사를 택한 이유 중에는 아침에 잘 일어나지 못하는 버릇도 있다. 이른 출근 시간을 맞추기 어려워 직장을 그만둔 적도 있다.

경향신문이 다시 만난 A고 졸업생 8명 중 5명이 한부모 혹은 조손 가정에서 자랐다. 이러한 차이는 청년의 삶을 이해하는 중요한 맥락이 된다. 가족과 함께 밥을 먹는 빈도와 학업 성취도 사이에 연관성이 있다는 연구 결과처럼, 부모와 교류할 수 있는 물리적 시간 자체가 인생의 경로에 주요 변수가 될 수 있어서다. 동현은 아버지를 1년에 한두 번밖에 보지 못했다. 동현의 학창 시절 타지 생산공장에서 일하던 아버지는 동현이 군대를 다녀오고 난 후에야, 기계에 팔이 빨려 들어가는 산재를 입고 강릉으로 돌아왔다. 준영은 “엄마 혼자 하시니까 돌봄을 받진 못했다”고 기억했다.

학교는 서로 다른 형태의 가족에서 비롯되는 차이를 전부 메워주진 못했다. 정호는 학교에 늦게 가고 싶으면 늦게 갔다. 식당 일을 마치고 새벽에 퇴근해 잠든 어머니가 아들의 등교를 세심히 살피긴 어려웠다. 선생님도 “딱히 혼내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학교는 공부나 기술을 배우는 곳이 아니었다. 학업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 태민은 수업 시간에 휴대전화를 가지고 놀았다. 학교는 ‘점심’을 먹는 곳이었다.

노력해서 얻은 성과에도 의미를 느끼지 못했다. 준영은 학교에서 딴 유일한 자격증을 “장롱면허”라고 했다. 취업을 앞두고선 전공(기계)과 무관한 호텔과 골프장 같은 일자리가 들어왔다. 정호는 “학교는 사회에 나가 해야 할 것들을 가르쳐주지 않았다”고 기억했다. 등 떠밀리듯 사회에 나와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학교에서 좁히지 못한 격차가 여전히 좁혀지지 않는 것만 같다.

태민에게 집은 여전히 “그냥 자다가 나가는 곳” “하숙집” “내 하루를 리셋하는 방” 정도다. 한편으로는 지병을 앓고 있는 부모의 병원비와 생활비, 공과금 등을 모두 부담하고 있다. 누나들이 부담하다가 지쳤고, 이제는 태민도 지쳐가고 있다. 강릉에서 몇 없는 좋은 직장을 다니는 태민의 꿈은 해외에 나가 ‘게스트하우스’를 차리는 것이다. 그건 아마 다음 단계로 좀처럼 넘어갈 수 없는 한국을 벗어나고 싶고, 어깨를 무겁게 하는 집을 등지고 싶다는 바람일지도 모른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빛 좋은 개살구 같아요.”

이정우(가명)는 고3 당시 반에서 유일하게 수능을 봤다. 원래부터 대학에 가려고 A고에 왔다. 인문계고에 가서 “깔아줄 바”엔 특성화고에 가서 내신이라도 잘 챙기는 게 낫다고 봤다. 하지만 정우가 A고에 간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뺨’을 때렸다. 아들의 선택이 ‘대학 포기’ 선언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정우는 성적에 맞춰 울산의 한 전문대 기계공학부에 진학했다. 지역도 전공도 모두 “먹고살기 위한” 선택이었다. 사실 그가 중고등학교 내내 되고 싶었던 것은 소방관이었다. 그는 “입시에서 관련 학과에 떨어지기도 했고, 취준생이 되면서부터는 꿈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대기업 생산직으로 일하는 정우는 스물일곱 살에 결혼해 네 살배기 아이를 키우고 있다. 요즘 느끼는 감정은 무기력함이다. 5년째 같은 일을 하는 직장에서도, 끝 모를 주택담보대출 원리금 상환이 기다리는 가정에서도 더 나아질 것이 없다는 생각에 자존감이 떨어진다.

그래서인지 정우는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남들”을 자주 소환했다. “남들도 나처럼” “어느 정도 남들처럼” “남들보다 잘하려고 하는 것 없이” 등. 남들처럼 살아야 한다는 의무감과 그렇게 살 수 없을 것만 같은 불안감이 느껴졌다. 정우는 10년 뒤 모습이 어떨 것 같은지 묻자 “같은 생활이 반복되지 않을까”라고 건조하게 답했다.

도로를 주행 중인 배달 라이더의 모습. 경향신문 자료사진

도로를 주행 중인 배달 라이더의 모습. 경향신문 자료사진

최영훈(가명)은 10년 전 거의 유일하게 확고한 꿈을 가진 학생이었다. 게임을 만들고 싶어서 게임학과가 있는 전문대에 진학했다. 지금은 진로를 조금 틀어 서버를 개발하는 프로그래머로 일한다. 교수가 창업한 회사에 정규직으로 들어갔지만 현재 하는 일이 자신의 경력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 불안하다.

현재로선 “이직 준비가 되지 않아서” 미래가 기대되지 않는다. 전문대가 아닌 4년제 대학에 들어가 프로그래밍을 더 깊이 공부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미련도 조금 남아 있다. 영훈은 “취업을 하고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고민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고교 졸업 후 10년, 대학에 갔든 곧장 취업했든 저마다 불안했던 이들이 또다시 불안한 앞날을 고민한다. 다음 10년은 어떤 모습일까. 8년간 제과제빵 경력을 쌓은 영준은 업종을 바꿔 시멘트회사 취업을 앞두고 있다. 그는 “평생 옮길 일 없는 곳에서 남들처럼 살고 싶다”고 말했다.

“황, 너는 팽이다 팽이. 의미 없이 돌기만 해.”

10년 전 같은 반 친구가 준영을 팽이에 빗대며 놀렸다. 준영뿐 아니라 경향신문이 다시 만난 A고 졸업생들은 설령 자기가 하는 일에서 의미를 찾지 못했더라도 멈추지 않았다. 지난 10년간 준영의 자랑거리는 “안 쉬고 열심히 일한 것”이다. 영준은 연휴가 다가올 때마다 “이번에는 또 어떻게 버티나”를 걱정하면서도 전직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기 전까지 다양한 제과제빵 기술을 익히려고 일부러 여러 매장을 옮겨 다녔다. 정호는 열 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의 ‘숨은 빚’이 남은 가족을 옥죄는 상황에서도 어머니와 함께 어려움을 헤쳐왔다.

하지만 정상 궤도를 따르는 사회의 잣대 앞에서 이들의 지난 10년이 한없이 작아진다. “저 같은 사람도 있어야 이 세상의 톱니가 돌아가지 않을까요?” 동현이 “너무 거창한 것 같다”며 다시 한번 멋쩍게 웃었다. 동현은 오늘도 누군가의 집 앞에 음식을 배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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