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Paris)원칙 위배” 예고 없는 ‘세종행’ 통보에 인권위 부글부글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 성동훈 기자
정부가 국가인권위원회 본부의 내년 상반기 세종 이전을 추진하면서 인권위 내부에서 반발이 나오고 있다. 독립기관의 이전을 사전 협의 없이 결정한 데다, 시민들의 접근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직원들 사이에서도 가족 돌봄과 주거 문제 등을 정리할 준비 기간조차 주지 않았다는 불만이 나온다.
16일 경향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인권위는 전날 긴급 전원위원회를 열고 세종 이전에 따른 문제점과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 한 인권위 관계자는 “보도를 보고 이전 방침을 알았다”며 “사전 통보나 협의가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내부에서는 이번 이전 방침이 국가인권기구의 독립성을 보장하는 국제 기준인 ‘파리원칙’ 취지에 어긋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다른 정부기관과 같은 건물에 입주하는 방안이 인권위의 ‘외관적 독립성’을 해칠 수 있다는 것이다. 업무를 독립적으로 수행하는 것뿐 아니라 피해자가 정부로부터 독립된 기관이라고 믿고 찾아올 수 있는 환경도 중요하다는 취지다.
파리원칙은 국가인권기구가 정부로부터 독립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자체 인력과 업무 공간, 충분한 재정을 보장하도록 한다. 이를 구체화한 세계국가인권기구연합(GANHRI, 간리)의 일반견해는 장애인을 포함한 시민의 접근성을 확보하고, 필요한 경우 다른 정부기관과 분리된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한 인권위원은 “국가기관을 상대로 문제를 제기하려는 사람이 찾아왔는데 인권위가 다른 국가기관들 속에 있으면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기관이라고 느끼겠느냐”며 “시민들이 위화감 없이 방문할 수 있는 장소와 시설을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세종 이전으로 진정·상담의 문턱이 높아질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현재 서울 본부는 서울·인천·경기 지역을 담당하고 있다. 온라인 진정이 가능하더라도 디지털 기기를 이용하기 어렵거나 대면 상담이 필요한 시민들을 위한 창구는 유지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인권위원은 “인권위가 꼭 서울에 있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라면서도 “진정사건이 많고 장애인과 이주민 등 사회적 취약계층이 접근하기 쉬운 곳에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전원위에서는 서울사무소 설치 필요성도 제기되고 있다. 본부가 이전하더라도 수도권의 진정·상담 수요를 감당할 대안을 먼저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서울사무소를 별도로 설치하면 공간과 인력 등에 추가 비용이 드는 만큼 기관별 기능과 이용자 분포를 고려해 이전의 실효성을 따져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이전할 공간이 업무 특성에 적합한지도 우려 사항이다. 인권위는 전원위와 상임위, 6개 소위원회가 자주 열리는 기관이다. 다른 위원회들과 건물을 함께 사용할 경우 회의실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겠느냐는 반응이 나온다.
직원들은 촉박한 이전 일정이 생활에 미칠 영향도 호소한다. 서울 근무를 고려해 인권위를 선택한 직원들도 있는데, 올해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내년 상반기까지 이전하라는 것은 준비 시간을 거의 주지 않은 것이라는 반응이다. 노부모 부양과 가족 병간호, 자녀 학교, 주택 임대차 계약 등 정리해야 할 문제도 적지 않다.
한 인권위 직원은 “배우자가 서울에서 일하거나 어린 자녀를 키우는 직원들은 가족이 함께 이주하기 어려워 결국 장거리 출퇴근을 택할 수밖에 없다”며 “이렇게 되면 실제로 세종에 정착해 지방분권 효과를 낼 수 있을지도 의문”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직원은 “기관별로 어디에 있어야 기능을 가장 잘 수행할 수 있는지 의견을 듣고, 직원들도 생활을 준비할 시간을 줘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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