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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November 1, 2026

1954년, 서용길 선거 포스터에 기절초풍하다 [금자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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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서울 종로구 을 선거구의 선거 벽보. 중앙선거관리위원회
1954년 서울 종로구 을 선거구의 선거 벽보. 중앙선거관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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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 국가권력에 의해 ‘프락치’로 몰려 구원받지 못한 채 북으로 간 국회의원들. ‘금자’는 소녀 금자의 시선을 따라 70년이 훌쩍 넘은 그 시간 속으로 여행을 떠난다. 대한민국 친위쿠데타와 내란의 기원을 마주한다. 월화수목금 연재.

기절초풍할 노릇이었다.

금자는 학교가 파한 뒤 교문을 나섰다. 거리 담벼락에는 민의원 선거 포스터가 줄지어 붙어있었다. 무심히 스쳐 지나가려던 찰나, 익숙한 얼굴 하나가 시선을 잡아당겼다. ‘아니, 아니 저분은….’ 아홉장의 포스터 중 하나에 ‘서용길’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눈을 씻고 다시 포스터 속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분명히 금자가 아는 서용길, 바로 그 제헌국회의원이자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특별검찰관 서용길(1912~1992)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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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명동에 살 때 아버지 강욱중의 심부름으로 내수동에 있는 그분의 집에 편지를 전달해 준 적이 여러 차례였다. 아버지와 함께 남로당 프락치 혐의로 감옥에 끌려갔음은 진작 알았다. 당연히 아버지처럼 전쟁과 함께 풀려나온 뒤 북으로 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떻게 화를 피해 남쪽에 있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생사도 모르는데, 이 분은 국회의원을 하겠다고 선거에 나오다니.’ 금자는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고 혼잣말을 하며 그날 보육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1954년 5월이었다. 금자는 아산 온양중학교 3학년이었다. 아버지는 북한 요원에 납치됐고, 어머니는 남쪽 공안원에게 끌려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 12살에 호각·호완·호기 등 남동생 세 명을 데리고 부산의 고모부 집으로 걸어서 피난을 가다 온갖 풍파 끝에 아산의 후생보육원에 정착한 때가 3년 전이었다. 두 오빠와 또 다른 동생 호림이와는 연락이 끊겼다. 살았다면, 할아버지가 있는 함안으로 갔을 터였다. 그곳엔 아무리 편지를 보내도 답장이 없었다. 그런데 아산의 거리에서 북으로만 간 줄 알았던 아버지의 동료 의원을 민의원 선거(제3대 총선, 5월20일 실시) 포스터로 마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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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선거에서 아산에 출마한 서용길 후보의 공보물. 금자가 중학생 때인 1954년 3월 아산에서 본 벽보 포스터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누리집에서 찾을 수 없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누리집
1960년 선거에서 아산에 출마한 서용길 후보의 공보물. 금자가 중학생 때인 1954년 3월 아산에서 본 벽보 포스터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누리집에서 찾을 수 없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누리집

서용길은 북으로 가지 않았다. 국회프락치 사건으로 기소돼 재판에 넘겨진 제헌국회의원 13명 중 그가 유일하게 남쪽에 남았다는 사실을 어린 금자가 알 리 없었다. 서용길은 한국전쟁과 함께 서대문형무소에서 풀려나온 뒤 성균관대 교수 시절 제자의 친척 집인 경기 벽제의 농가로 도피해 납북을 면할 수 있었다고 했다.

이후 서울 수복 뒤엔 검찰청에 자진출두해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구속되기도 했다. 주변에서 백방으로 손을 써준 덕에 1951년 2월 무죄 판결을 받았다. 1심에서 3년형을 받았던 국회프락치 사건의 경우엔 항소심 재판부가 1951년 12월 서용길을 제외한 피고들이 없는 상태에서 전쟁 중 기록 멸실’을 이유로 13명 모두에게 공소기각 판결을 내렸다. 형이 확정되지 않았으므로, 피선거권 제약은 없었다. 아산은 서용길의 고향이었다. 1948년 5·10 총선거에서 36살의 젊은 나이로 대원로 윤보선을 꺾고 당선하여 정치적 야망을 불태우던 곳이었다. 국회프락치 사건으로 만신창이가 됐는데도 재기를 노리며 고향에 출마한 그의 포스터를, 마침 아산에서 보육원 생활을 하던 금자가 목격한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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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 가족과 생이별한 채 보육원에 가야 했던 금자에게 서용길의 출현은 혈육을 만난 듯한 반가움을 안겨주었다. 아버지 강욱중에 대한 그리움은 서용길에게 투영되었다. 그러나 그걸로 끝이었다. 보육원에서 중학교를 다니는 금자가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서용길은 선거에서 졌다. 3474표, 6.90%를 얻어 9명의 후보 중 7위를 했다. 애초 가망이 없던 일이었다. 서용길을 직접 만난 것은 그로부터 33년 만인 1987년이었다. 제헌국회의원들의 모임인 ‘제헌동지회’가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접한 뒤, 당시 두꺼운 전화번호부 책에서 번호를 알아내 연락했다.

“1987년이면 개혁에 대한 기대가 활활 타오르던 때였죠.”

“정말 세상이 바뀔 것 같은 분위기였어요.”

“서울대생 박종철이 물고문당해 죽은 일이 기폭제가 되어 전국민적인 6·10항쟁이 일어났고 대통령 직선제 요구를 관철했죠. 16년 만에 치러지는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이나 김대중이 노태우를 누르고 정권교체를 할 것만 같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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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프락치 사건으로 고통받은 이들에게 주목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어쩌면 서용길 의원님이 유일했어요.“

1967년 충남 아산에 출마한 서용길의 포스터. 한겨레 자료.
1967년 충남 아산에 출마한 서용길의 포스터. 한겨레 자료.

강금자 여사님은 4월 첫 만남 때부터 ‘서용길 의원님’과 재회한 이야기를 했다. 이후에도 틈만 나면 그 에피소드에 관해 잠깐씩 언급했다. 서용길은 강금자가 고아가 된 뒤 유일하게 처음으로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해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어른이었다. 형제들 간에는 아버지를 입 밖에 내기 어려웠다. 특히 아버지에 관해 일기에 썼다가 피난길에 경찰에 발각돼 형무소 생활을 두 번이나 한 큰오빠 호걸 앞에선 철저히 금기였다.

이날 종로구 통의동의 설렁탕집에서 만난 서용길과 강금자는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금자는 “어머니마저 돌아오지 못했다”고 말했고, 피난길에 우여곡절을 겪다 보육원에 가게 된 사정을 설명했다. 서용길은 북에 가지 않기 위해 “산속에 들어가 굴을 파고 살았다”고 했다. 금자를 위로하며 “이 설렁탕은 아버지가 사주는 것으로 생각하고 먹으라”고 말하기도 했다. 국회프락치 사건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조작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대선 출마 이야기를 꺼냈다. 서용길은 1954년 두 번째 선거에서 떨어진 이후로도 1967년까지 세 번 더 아산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그런데 20년 만에, 이번에는 대선에 출마하겠다는 거였다.

“대선 출마에 대해 무슨 말씀을 드렸나요?”

“다들 의원님을 빨갱이로 아는데 출마를 해도 되겠냐고 했죠. 그랬더니 국회프락치 사건이 조작됐음을 알릴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면서 출마하겠다고 하셨어요. 누가 광산을 팔아서 선거비용을 대주겠다고 했다는 이야기도 하셨고요.”

“이후에도 연락을 주고받았나요.”

“전화가 한 번 왔었어요. 대통령 출마할텐데 제 신랑*이 선거운동해줄 수 있느냐고. 그리고 5년 뒤 돌아가셨어요.”

“그분 사모님도 아시지 않나요?”

“당연히 알죠. 우리 집에 자주 오셨는데, 멋지게 원피스를 입던 신여성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근데 1998년에 그 사모님 인터뷰 기사가 한겨레신문에 나왔어요. 제가 그 기사를 보고 깜짝 놀라 마포 한겨레신문사를 찾아갔어요. 그걸 써준 기자가 너무 고마워서, 정말 눈물 나게 진심으로 고마워서 인사를 하고 싶었어요. 밤에 찾아갔는데, 기자가 출장을 갔다고 하더라고요. 그냥 돌아왔어요.”

1998년 8월3일자 ‘한겨레’에 실린 서용길 전 의원 부인 이영란씨 인터뷰 기사. 이 기사를 본 강금자 여사는 당일 바로 감격에 겨워 한겨레를 방문했으나 해당 기자를 만나지는 못했다. 한겨레 갈무리
1998년 8월3일자 ‘한겨레’에 실린 서용길 전 의원 부인 이영란씨 인터뷰 기사. 이 기사를 본 강금자 여사는 당일 바로 감격에 겨워 한겨레를 방문했으나 해당 기자를 만나지는 못했다. 한겨레 갈무리

서용길의 부인 이영란**을 인터뷰한 신문기사를 찾아보니, 1998년 8월3일자였다. 정부수립 50돌을 맞아 반민특위·국회프락치 사건을 10대 의혹사건의 하나로 조명하며 작은 상자기사에 이영란 인터뷰를 실었다. 이영란은 이 인터뷰에서 “아직도 당시 사건을 조작했던 사람들이 살아있는 상태여서 말을 하기가 겁이 난다. 프락치사건이 조작이었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 죽기 전까지 남편의 꿈이었다”고 말했다.

강금자가 이영란의 인터뷰를 신문에서 본 것은, 그로부터 44년 전인 1954년 온양에서 서용길의 선거 포스터를 본 일 만큼이나 비현실적이었다. 21세기가 다가오던 1998년에도 국회프락치 사건이란 그만큼 감히 드러내놓고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또 36년이 흘렀다.

“제가 꼭 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 이문원 의원님의 따님 동희 언니예요. 동희 언니는 전쟁 터지기 전 숙명여자중학교 4학년이었어요. 우리 집에 심부름을 자주 왔는데, 동급생인 작은 오빠(호주)와 막역하게 지냈어요. 제가 언니가 없어서, 그 언니를 많이 따르고 좋아했죠. 이문원 의원님 납치당하고 난 뒤 그 언니가 우리 집에 와서 ‘이제 우리는 아버지를 영영 못 본다’고 하면서 함께 많이 울었거든요. 전쟁 끝나고 제가 서용길 의원님 찾듯 동희 누나도 애타게 찾았지만 실패했어요. 그 언니 만나면 푸념도 하고, 마음에 맺힌 이야기도 많이 털어놓고 싶었어요.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나타나지 않았어요. 가끔 한 다리 건너 들리는 그분 가족에 관한 소문은 하나같이 어두웠어요.”

그래도 제헌국회의원의 자녀들은 한 명씩 세상에 나왔다. 초창기 구심점은 반민특위 기념사업회였다. 노일환의 조카가 나타났고, 김병회의 딸과 김옥주·신성균·서용길의 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강욱중의 딸 강금자는 가장 늦었다. 13명 의원 중 아직도 과반이 넘는 7명의 자녀는 숨어있다. 대부분 연좌제 딱지 때문에 ‘출국’할 수 없는 처지여서 외국으로 나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 고난의 시절을 견뎌왔고, 또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계속 유족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이번에는 사건의 최고 핵심 주동자로 몰린 노일환의 후손이다.

<다음 회에 계속>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강금자는 1972년 결혼했다.

**서용길의 부인 이영란(1920~2013)은 생전에 남편을 ‘S’라는 이름의 주인공으로 삼아 ‘비망록’을 기록해 남겼다.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인한 구속과 한국전쟁 중의 석방, 1·4 후퇴 전 재구속돼 부산형무소로 이송되는 과정 등을 담은 이 비망록은 아들 서영철씨가 지난 6월 한겨레에 기증해 관련 내용이 보도됐다.

​글쓴이 소개

사회부 기자.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추적한 ‘베트남전쟁 1968년 2월12일’과 유해발굴을 통해 한국전쟁의 상흔을 드러낸 ‘본헌터’를 썼다. 그밖의 지은책으로 ‘유혹하는 에디터’, ‘굿바이 편집장’, ‘대한국민 현대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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