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의 과정에 온전히 헌신하는 사람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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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경의 에이징북
팔순을 훌쩍 넘긴 내 어머니는 요즘 일상 풍경을 그리는 스케치에 푹 빠져 있다. 황반변성으로 시력을 잃어가고 어깨와 허리 통증이 만만찮은데도 끈질긴 열정으로 몰입 중이다.
어머니를 만날 때마다 타이머를 맞춰두고 자주 일어나시라고 잔소리를 하지만 내심 무언가에 그토록 빠져드는 마음에 경탄하곤 한다. 초보자의 서투름을 잘 견디지 못해 뭘 배워도 오래가지 못하고 과정보다 결과에 꽂히는 기질을 다 버리지 못한 나로서는 부럽고 귀한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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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치를 하거나 동식물을 돌보고 뭔가를 만들면서 어떤 대상, 존재에 온전한 관심을 기울이고 결과보다 지금 여기의 과정에 무게를 둘 줄 아는 자세는 나이가 들수록 더 긴요하다. 그 동기가 현실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든 치매를 예방하기 위해서든, 무엇이 되었든 말이다.
과정에 헌신하는 인물을 꼽자면 레바논계 미국 작가 라비 알라메딘이 쓴 소설 ‘불필요한 여자’의 주인공을 따를 자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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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바논의 베이루트에 사는 72살 여성 알리야는 열여섯에 억지로 결혼했다가 이혼당한 뒤 서점에서 오래 일했고, 지금은 친구도 없이 철저히 혼자인 처지다. 어릴 때부터 그를 박대한 엄마와 이부동생은 알리야가 겨우 깃들여 사는 집까지 빼앗으려 안달이다. 공습과 약탈로 불안한 도시에서 알리야는 잘 때도 소총을 옆에 둔다. 유일한 친구였던 한나가 죽고 난 뒤 알리야의 고통은 더 심해졌다. 그런 그가 기대어 사는 대상은 오로지 읽기와 쓰기뿐이다.
알리야는 늘 새해 첫날 번역을 시작해 50년간 37권의 책을 아랍어로 옮겼지만 단 한권도 출판하지 않았다. “묶이지 않은 상태의 번역본을 상자에 넣는 일”, 그것이 그의 삶이다. 세간의 기준으로 보자면 불필요한 일에 몰두하는 사람이 아닌가. 그러나 이 무용한 행위가 그에게는 삶의 의미이자 가혹한 세월을 견디게 해주는 중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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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읽지 않을 번역을 하는 것에 대해 그는 자신이 “최종적인 결과물이 아닌 과정에 헌신”한다고 말한다. 번역하는 동안 가끔은 “굳이 애쓰지 않아도 지복이 찾아”오며, 따분한 삶에서 그렇게 이따금 황홀경의 순간을 겪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긴다. 자신의 일이 쓸모없는 것을 알면서도 그 일을 하는 것 자체를 무한히 소중하게 여기는 고독한 수행자와도 같다.
알리야에게 읽고 쓰는 일은 시간을 견디는 수단일 뿐 아니라 단단한 도피처이기도 하다. 여성이 삶의 방향을 스스로 선택할 수 없고 혼돈이 일상인 도시에서 노인이 된 그는 책과 음악으로 견고한 성을 쌓고 그 안에 칩거한다. 홀로 읽고 쓰면서 노년의 패배감과 고독, 고통의 우연성, 전쟁의 불안, 삶의 아이러니를 살아낸다. 문학은 그에게 세상을 이해하는 기술이자 불안과 고독 속에서도 삶 쪽으로 그를 끌어당기는 구명줄이다.
나는 아름답고 번뜩이는 문장들에 빽빽이 밑줄을 긋고 숱한 작가와 책의 인용에 종종 길을 잃기도 하면서 읽다가 문득, 알리야가 책을 통해 얻는 공감이 책 바깥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궁금해졌다. 읽기와 쓰기가 타인과의 사이에 둘러친 마음의 담장을 견고하게 만들 뿐이라면 고독의 성채를 짓는 절연의 도구에 불과하지 않을까.
알리야는 책을 읽을 때 자신과 책을 가르는 장벽을 허물고 책에 연루되려고 애쓰며 책의 모든 주인공과 작가에게 공감한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밀쳐내던 엄마에게 공감할 수 없어서 번민한다. 관념 속 인류를 사랑해도 내 눈앞의 흠 많은 개인은 품기 어려운 걸까. 나는 엄마를 이해하지 못해 괴로워하던 알리야의 고민보다 그의 행위에 눈길이 갔다. 그는 엄마와 함께 사는 이부동생네 식구 누구도 관심 갖지 않던 엄마의 아픈 발을 씻겨주고 돌아온다. 책은 내가 다 알 수 없는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도록 돕진 못하겠지만, 적어도 이해하지 못한 채로도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법을 가르쳐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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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서 겉으로 견고해 보였던 알리야의 성은 뜻밖의 사고로 무너진다. 위층의 파이프가 터져 그가 평생을 바친 번역 원고들이 물에 잠겨버린 것이다. 알리야는 인생이 눈앞에서 무너지는 듯한 절망감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바람이 딴 데서 불어오듯 같은 건물에 사는 세 여성이 그를 구한다. 알리야가 ‘세 마녀’라 부르며 거리를 두던 이들이다. 그들은 아무도 읽지 않을 번역을 하는 알리야를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세상의 눈엔 그저 젖은 폐지 뭉치에 불과할 번역 원고를 구하려 정성을 다한다. ‘안나 카레니나’의 남자들 중 누가 나은지 소소한 수다를 떨면서 원고를 말리고 다리미로 펴는 사이, 알리야가 책 속 인물들과만 나누던 대화가 비로소 사람들 사이로 번진다.
이 장면을 읽으면서 스무살 때 폴 엘뤼아르의 시집 ‘이곳에 살기 위하여’에서 처음 만난 뒤 평생 내게서 떠나지 않은 시구절이 떠올랐다.
“나 홀로 있는 곳에서 나는 많은 인간을 만나며/ 나의 근심은 가벼운 웃음으로 깨어지고.”
세 여성의 부산스러운 수다와 웃음이 알리야의 닫힌 세계에 틈을 내어 그 사이로 사람의 온기가 스며든다. 예전의 알리야였다면 이들을 쫓아냈겠지만 이제 그는 우연한 사건을 통해 자신을 갱신한다. 내 어머니도 흐린 시력으로 서툰 선을 그으며 날마다 새로운 세계와 만나는 중이다. 어쩌면 지금 여기의 과정에 온전히 헌신하는 사람만이 나이의 한계에 갇히지 않고 마음을 열어 삶이 건네는 우연한 선물을 기꺼이 받아안는 모험을 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몇살이 되었든 여전히 사람은 자기 자신을 뛰어넘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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