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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September 18, 2026

악마화한다고 악마인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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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권 내에서 진영 다툼을 벌이는 모습을 그려달라’는 조현의 요청에 따라 제미나이가 인공지능으로 합성한 이미지.
‘여권 내에서 진영 다툼을 벌이는 모습을 그려달라’는 조현의 요청에 따라 제미나이가 인공지능으로 합성한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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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청래가 자랑스럽다. 재명아, 일단 재판부터 받자.” “신천지 통일교 문제다. 정청래는 윤석열보다 싫어요.”

요즘 진보세력이 친 이재명과 친 정청래로 쪼개져 극한 대립을 하고 있는 걸 보면서 사람의 본성에 대해 다시 돌아보게 됩니다. 같은 진보라는 이들이 동지들을 보수세력보다 더 미워합니다. 생각과 이해관계가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같이 어울려 살아가는 ‘공화’(共和)의 정신은 그저 헌법에나 쓰여 있는 공염불입니다. 진보와 보수의 ‘공화’는커녕, 진보끼리도 저러하니 동인·서인, 남인·북인, 노론·소론으로 끝없이 갈려 나가면서 서로 죽이고 죽던 조선시대 당파 싸움이 고스란히 무대를 옮긴 거죠.

저만 옳다고 우기면서 죽기 살기로 싸운 게 우리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같은 그리스도교인이면서도 백년전쟁을 치룬 영국과 프랑스는 어땠나요. 잔 다르크는 프랑스에서는 성녀지만 영국은 이단이라며 화형에 처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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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를 가르친 부처님의 제자들도 그랬어요. 스리랑카의 상좌부 전통은 부처님 말씀을 빠알리(pali)어(語)로 오롯이 보관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있었죠. 그런데 2~3세기경 대승불교 운동이 시작되면서 자신들을 소승이라 폄하하자 엄청 분개하여 대승 승려들을 탄압했지요. 이때 쫓겨났던 대승 승려들은 절치부심하다가 왕을 꼬드겨 다시 스리랑카에 돌아와 철저히 보복했습니다. 그런데 왕이 다시 변심하자 이번에는 상좌부가 대승들을 다 죽이고 대승 계통의 문헌들을 철저히 말살했습니다. ‘능가경’은 그 와중에도 살아남은 유일한 대승 경전입니다. 본 이름은 ‘대승입능가경’인데 ‘능가’는 ‘스리랑카’의 한역이고 대승이 스리랑카에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대승이 상좌부를 개종시키려는 목적에서 편집된 것임을 보여주는 거죠. 능가경은 상좌부를 향하여 왕이 사자와 교접하여 낳은 족속들로 육식을 해서 열반에 들기 어려운 자들이라고까지 공격합니다.

그리스도교에서 성인으로 존경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삶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오랜만에 그분의 ‘고백록’을 다시 읽었습니다. 전에 읽었을 때와는 달리 그분은 ‘성인’이라기보다는 뛰어난 ‘학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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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는 인간을 포함한 이 세상이 어떤 원리로 생겨나고 어떻게 변해가는가를 열심히 탐구하는 사람입니다. 성인은 자신의 이기심을 넘어서신 분이고요.

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사물과 사건에는 원인이 있기 마련이니 그 마지막 원인이 신이라고 결론냈지요. 이건 그저 머릿속 논리 전개의 결과일 뿐 실제 사물과 사건의 생성 소멸을 설명해주는 게 전혀 아니지요. 물리학의 빅뱅 이론과 생물학의 진화론은 어떻게 우주먼지에서 별이 생겨나고 생명체가 생겨나고 진화를 통해 이 세계와 자신을 이해하는 인간이 출현하게 되었는지를 잘 설명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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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보면 다른 것으로부터 독립하여 변하지 않고 고정된 건 하나도 없고 서로 기대어 새로운 걸 생성시키며 끝없이 변해간다는 불가의 연기론(緣起論)은 엄밀히 말하면 과학의 영역이지 종교의 영역은 아니란 생각입니다.

반면 종교의 영역은 세상의 사건과 사물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개체인 “나”를 대면하는 겁니다. 나는 나를 어떻게든 유지하고 또 다른 나인 자손을 통해 나를 이어가고자 합니다. 생존과 번식. 모든 생명체가 가진 이 ‘이기심과 직면’하는 게 종교입니다. 하느님이 흙을 주물럭거려 사람을 만들었다느니 하는 창조론이나, 전생에 나쁜 짓을 해서 지금 어렵게 산다느니 하는 윤회론은 이 세상의 사건과 사물에 대해 설명을 하는 과학의 영역으로, 학문의 발전에 따라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대한 이해를 통해, 우리처럼 세상을 이해하는 인공지능까지 만들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남는 문제는 바로 “나”입니다. 나는 잘 먹고 잘살고 싶고, 죽지 않고 계속 존재하고 싶습니다. 개체인 “나”의 이 유한성과 이기심, 무지에 대면하는 게 바로 종교이고, 여러 스승님들이 가르쳐주신 답은 일치합니다. “나”의 속박에서 자유로워지는 길입니다. 이걸 구원이라고도 하고 해탈이라고도 합니다. “내”가 구원받고 “내”가 해탈하는 게 아니라 이 나의 유한성과 이기심, 무지를 깨닫고 전체이신 당신께 귀의하는 길. 기독교에서는 하느님이라, 힌두교에서는 아트만이라, 불교에서는 진여, 불성이라 이름합니다. 그런데 ‘고백록’에는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나라는 것이 온통 지선하신 하느님으로부터 왔다면 도대체 누가 내 안에다 악(惡)을 두어 고통의 씨앗을 뿌려 놓았느냐? 만약 악마가 한 노릇이라면 그 악마는 어디서 생겼나? 나는 이런 생각에 새삼 가위눌려 숨이 막힐 지경이었습니다.” 신이 이 세상 모든 것을 창조하였다면 악마나 악 그 자체도 신이 창조하였다는 거 아니냐? 하고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민합니다. 나중에 그분은 악이란 실체가 따로 있는 게 아니고 그저 선의 부재(不在)일 뿐이라고 다소 애매한 결론을 냅니다. 있음과 없음이라는 존재의 세계를 넘어선 전체이신 당신을 하나의 실체인 양 여기고 이 존재의 세계를 진흙으로 만들었다는 창조론의 세계관에서 보면 ‘악을 창조한 하느님’이라는 이상한 결론에 도달하고 맙니다.

그분이 그토록 고민한 악이란 마치 플라톤이 이야기하듯 악마나 악이란 이데아, 실체가 있는 게 아니고 이 “나”란 개체가 가지고 있는 유한성, 이기심, 어리석음을 돌아보아 반성하지 못하고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그대로 드러내는 것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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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는 하느님 앞에서 계속 “나”를 호소합니다. “뉘 있어 나를 당신 안에 쉬게 하여 주리까? 그 누가 당신으로 하여금 내 마음 안에 오시게 해주리까? 내 마음 흠뻑 취하게 만드시면 내 죄악 모두 잊고, 오직 하나인 나의 행복 당신을 얼싸안으오이다. 당신은 나의 무엇이 되시나이까? 내가 당신의 무엇이길래 나 같은 것이 당신을 사랑하라 명하시고, 아니하시면 엄청난 비참을 내리시리라 으르시나이까? 내 영혼에게 말씀하소서, 네 구원이 나로다라고,”

이 대목을 볼 때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자신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고백록의 원동력이란 생각이 듭니다. 나는 나의 유한성, 이기심, 어리석음을 잘 알기에 전체이신 당신을 감히 나의 상대방이라도 되는 양 마주 대면하여 구원을 호소하는 일은 엄두도 못냅니다. 그저 납작 엎드려 입 닫고 있는 것 밖에는.

그분은 세상이 어떻게 생겨 있는지를 알아보는 과학의 영역을 종교의 영역으로 끌고 갑니다. 유명한 펠라지우스와의 논쟁이 그러합니다. 펠라지우스 주교와 그 지지자들은 이 세상이 하느님의 피조물임을 찬양하고 인간이 자유의지를 통해 예수를 모범 삼아 그의 가르침을 따름으로써 스스로 축복된 삶을 살 수 있다고 가르쳤지요. 그에 반해 아우구스티누스 주교는 아담의 원죄로 인간은 자유롭지 못하며 죄와 죽음에 굴복할 수밖에 없고 예수의 십자가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주장을 폅니다. 나아가 이런 이야기까지 합니다.

“악마가 어린이들을 죄인으로 붙잡아두는 이유는 혼인을 선하게 만드는 그 선에서 어린이들이 태어나지 않고 정욕의 악에서 태어나기 때문이다. 죄의 딸 같은 이 육욕으로부터 태어나는 사람은 누구든지… 원죄에 얽매이게 된다”면서 세례받지 않고 죽은 어린이는 지옥에 간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로마황제 권력을 동원하여, 성욕은 선천적인 것이며 그 자체로 선한 것이라 주장하는 펠라지우스를 철저히 몰락시키고 맙니다. 성인이라기보다는 학자의 면모인거죠.

이런 현상은 가톨릭 교부들의 교리 논쟁에만 국한된 게 아님은 종교개혁의 기치를 내건 칼뱅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장로교회를 창시한 그는 4년 동안 종교법원을 열어 예정설, 삼위일체설, 유아세례, 성만찬의 해석을 둘러싸고 자신의 견해와 다른 이들을 수없이 추방하고 투옥하고 사형에 처했습니다.

나의 이기심, 유한성, 어리석음을 반성함으로써 다른 이웃과 삼라만상을 품어 안는 것이 종교의 본령입니다. 그런데 이런 종교조차 자신과 다른 견해를 죽기로 핍박해왔으니, 서로 다른 생각과 이해관계를 조정해야 하는 정치 영역은 더 말할 것도 없겠지요. 역사는 온통 전쟁과 목숨을 건 당파 싸움으로 점철되어왔습니다.

수사권과 기소권을 분리하는 것은 권력의 남용을 막는 적절한 방법입니다. 그 제도화를 둘러싸고 검찰에 보완수사권을 어느 정도 남겨둘 것인지의 문제는 선악의 문제도 아니고 지극히 기술적이고 실용적으로 접근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를 둘러싸고 방법론이 다르다고 어제까지 동지였던 상대방을 서로 악당으로 몰아갑니다.

나도 아우구스티누스처럼 감히 전체이신 당신께 투정 좀 부려보고 싶습니다. “하느님, 내 이웃들이 ‘재명아, 재판 가자’, ‘정청래가 윤석열보다 더 싫어요’ 이런 말 좀 하지 말게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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