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람”…최불암, 우리 이웃의 삶을 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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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최불암(본명 최영한)은 평범한 이웃의 얼굴을 대변하는 배우였다. 지난 29일 87살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그는 ‘수사반장’에서는 정의감 넘치는 형사 박영한 반장으로, ‘전원일기’에서는 농촌 마을의 큰 어른이자 대가족의 가장 김민재 회장으로,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나볼 수 있는 친근하고 소탈한 서민을 연기해왔다.
1939년생(호적상 1940년생)인 최불암은 16살 때인 1955년께부터 어머니가 명동 예술극장 근처에서 운영하 던 가게 ‘은성’에서 예술에 대한 꿈을 키웠다. 1964년 국립극단 단역에서 시작해 이듬해 정식 단원으로 뽑히며 연극배우 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지난 5월 방송된 문화방송(MBC) 다큐멘터리 ‘파하 최불암입니다’에서 최불암은 “우리 어머니가 ‘우리 아들이 연극을 하니 잘 봐달라’고 얘기하면 손님들이 ‘대사는 이렇게 느리게 하면 안 된다’며 조언을 해주셨다”고 회상했다.

텔레비전 드라마로 진출한 것은 1967년 서울중앙방송(현 KBS) 특채 6기 탤런트로 뽑히면서다. 그해 그는 한국방송 드라마 ‘수양대군’에 출연해 20대 후반의 나이로 50대의 장군 김종서를 연기했다. 연극배우 생활을 하던 그가 한국방송(KBS), 문화방송(MBC) 등 방송 무대로 향하게 된 배경에는 지금의 아내이자 동료 배였던 김민자가 있다. 최불암은 한 신문 인터뷰에서 “내가 한국방송 행을 결정한 것은 한 여자 때문이었다”며 “아내가 된 김민자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녀를 만난 후 나는 국립극단을 떠날 것을 결심했다. 연극보단 사랑을 택한 것”이라고 말했다. 최불암은 1960년대 후반 한국방송(KBS) 드라마 ‘정동마님’에 출연한 김민자에게 첫눈에 반했고 한국방송 3기 공채 탤런트로 인기를 누리던 김민자와 가까워지기 위해 방송국으로 적을 옮긴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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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그는 드라마 ‘수사반장’(MBC)을 만나며 국민 배우로 거듭난다. 1971년부터 1989년까지 방영한 ‘수사반장’은 실제 일어났던 사건을 다룬 현실 밀착형 드라마로, 급속한 산업화·도시화가 부른 범죄 사건의 이면을 다루며 평범한 사람들의 애환과 형사의 고뇌를 담아내며 인기를 끌었다. 최불암은 ‘수사반장’에서 정의감과 인간미가 넘치는 형사 박영한 반장 역할을 맡아 큰 사랑을 받았다.

작품과 캐릭터를 향한 그의 열정도 남달랐다. 그는 ‘수사반장’을 하는 동안 형사처럼 살았다. 자문을 맡았던 고 최중락 형사와 실제 사건 현장을 누비기도 했다. 최불암은 지난 2024년 5월 ‘수사반장’의 스핀오프작 ‘수사반장1958’ 방송 당시 한겨레와 인터뷰에서 “새벽 1시든 2시든 전화가 오면 현장에 나갔다”며 “힘들고 귀찮을 때도 있었는데 반장으로서 책임감이 있으니까 사건을 알아야 진실하게 연기하고 피해자의 심정을 대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밝힌 바 있다. 시청자들도 그를 정말 형사로 여겼다고 한다. 당시 유명 배우의 결혼식 때 선물 받은 ‘크리스챤 디올’ 넥타이를 “그게 뭔지도 모르고” 착용했다가 ‘공무원이 명품을 하느냐’는 시청자 항의도 받았다. 박 반장은 수사하면서 늘 담배 네대를 피웠는데, 육영수 여사가 박정희 대통령도 자꾸 따라 피운다며 두대로 줄여줄 수 없겠느냐고 전화를 한 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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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불암의 또 다른 대표작은 1980년부터 2002년까지 방영된 장수 드라마 ‘전원일기’다. 그는 농촌과 가족 문화 변화의 중심에 선 가장이자 마을의 큰 어른인 김민재 회장을 연기하며 ‘국민 아버지’라는 별명을 얻었다. 김혜자가 아내 이은심 역할로, 김용건은 고지식한 장남 김용진을, 유인촌이 우직한 차남 김용식을 연기했다. 며느리로는 고두심, 박순천이 출연했다. 그가 연기한 김 회장은 집안에선 근엄하면서도 자애로운 아버지였고, 마을에선 마을 사람들이 대소사를 의논하러 오는 사려 깊은 어른이었다. 최불암과 부자지간으로 연기 호흡을 맞춘 유인촌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30일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를 찾아 최불암이 남긴 말로 “행복이 멀리 있지 않다. 등 뒤에 있는 창문을 열어봐라. 행복이란 놈이 거기 있을 거다”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전했다.
그는 사회 문제에도 적극적으로 관심을 기울인 예술인이었다. 1981년 방영된 전원일기 한 회차에서 김 회장(최불암)은 시장에서 구걸하던 아이 금동이를 입양하는 이야기가 그려졌다. 입양이란 단어조차 생소하던 시절, 당시 보육원에서 나온 한 아이가 아파트 단지에서 동사한 사건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에피소드였다. 그해 최불암도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에 후원을 시작했고 전국 후원회장을 지냈다. 또 미아 찾기와 희소병·난치병 어린이 돕기 특별 생방송에 출연하는 한편, 사단법인 제로캠프 이사장을 지내며 병마와 싸우는 어린이를 돕고 소년수형자들의 사회 복귀를 돕는 활동을 이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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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의 역할을 연기에만 가둬두지 않고 영향력을 활용해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힘써왔다. 생전 인터뷰에서 이러한 철학을 언급한 바 있다. 최불암은 2011년 1월 방영한 한국방송(KBS) ‘여유만만’에서 “대중 앞에 얼굴을 내놓고 산 사람이니, 얼굴값이 된다면 무슨 일이든 뛰어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2015년 11월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전국후원회장 취임 30주년을 맞아 진행한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는 “ 진정한 봉사는 비 맞고 있을 사람에게 우산을 받쳐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이다.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사람”이라고 말했다.

자라나는 청소년을 향한 그의 애정은 각별했다. 2024년 한겨레와 인터뷰에서 “죄지은 놈은 또 죄를 짓는다는 생각에 사회에서 냉대하니까 (아이들이) 인생을 제대로 살 기회를 놓치기도 한다. 물론 진짜 나쁜 죄를 짓기도 하지만, 반성하고 잘 살아보려고 마음먹는 애들도 많은데 전과 때문에 마음처럼 안되니까. 아이들의 미래를 밝혀주고 싶다”고 말했다. 2015년 5월18일 성년의 날을 하루 앞두고 한겨레와 가진 인터뷰에서는 “요즘 아이들, 스트레스 많이 받는다. 그 나이 때는 사랑을 해야 한다. 사랑만큼 돈 안 드는 게 어딨느냐. 삶의 가치와 충만함을 사람에게서 느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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