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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October 9, 2026

[책과 삶]간첩으로 체포되는 순간에도 학술대회 걱정···일곱 이름으로 산 정수일, 혹은 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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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말레이시아 말라야대학 이슬람아카데미 강사 재직 시절의 정수일. 창비 제공

1982년 말레이시아 말라야대학 이슬람아카데미 강사 재직 시절의 정수일. 창비 제공

일곱 개의 이름

차병직 지음 | 창비 | 496쪽 | 2만3000원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20여년 전부터 정수일(1934~2025)을 알았으며, 십수년간 거의 매주 두어 시간씩 그의 이야기를 듣고 메모한 변호사 차병직이 쓴 500쪽 가까운 평전을 읽고도 마찬가지다. 그가 만주 화전민 부부의 아들 ‘해성’으로 태어나 ‘수일’로 개명한 뒤 일제강점기의 요시타케 슈이치, 중국인 정서우이, 레바논에서 얻은 신분 무함마드 깐수, 북에 드나들 때 쓴 가명 김성철, 이철수로 살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북한의 지령을 받은 그는 레바논계 필리핀인이라는 위장 신분으로 교수가 돼 간첩 활동을 하다 1996년 안기부에 체포됐다. 4년여간 복역한 뒤 가석방됐고 이후에는 문명교류학 연구자로서 답사, 강의, 연구, 집필에 매진했다. 북한에 아내와 세 딸을 남겨두고 왔으며, 한국에서 다시 결혼했다. 그가 재직한 단국대도, 한국의 부인도 체포 이전엔 그가 무함마드 깐수가 아니라 정수일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정수일은 그렇게 신중했다. ‘의뭉스럽다’고 해도 무방했다. 가석방 때 서명한 준법서약 때문인지, 이후에도 줄곧 감시 상태에 있다는 인식 때문인지 알 수는 없다. 가석방 이후에는 사상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다.

평전에는 결국 출간되지 않은 정수일 팔순 기념문집의 원고 내용이 일부 소개됐다. 정수일과 20년간 산악회 동료로 알고 지낸 소설가 이호철은 정수일이 솔직한 속내를 드러내 보인 적이 없다면서 속으로는 여전히 공산주의자가 아닐까 의심한다. 법학자 안경환은 “이데올로기니 정치체제니, 그런 것은 애당초 그의 관심사 밖이었던 것 같다”고 추측한다. 그를 오래 알았던 사람들의 인식도 엇갈리니, 평전의 독자는 더욱 그러하다.

1958년 중국 외교관 자격으로 모로코 국왕 앞에서 통역하는 정수일. 창비 제공

1958년 중국 외교관 자격으로 모로코 국왕 앞에서 통역하는 정수일. 창비 제공

평전은 사형 구형과 체포 당시 상황을 묘사하며 시작한다. 비록 간첩이었지만 그는 평생 학자고 글 쓰는 이였다. 법정 최후 진술에서는 “어떤 처벌을 받더라도 할 말이 없다”면서도 압수된 컴퓨터에 저장된 원고만은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가석방되던 날에는 교도소에서 쓴 원고 반출이 불허당하자, 원고와 함께가 아니라면 나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수사관들에게 붙잡혀 끌려가는 순간에도 “보름 뒤로 예정된 학술대회에 참가할 수 없다는 난감함”이 먼저 들었다. 접선 때문에 오갔던 중국과 일본에서조차 그는 서점에 들러 책 수십 권을 사들고 귀국했다.

전기적 사실은 정수일이 대단한 엘리트였다는 점을 보여준다. 옌볜에서 중국 최초 가오카오(대입시험)를 치러 최고 대학인 베이징대에 합격한 2인 중 한 명으로, 동방학부 아랍어 전공을 택했다. 베이징대 시절 사회적 신분과 인간적 품성을 보증하는 공산당원이 됐고, 조기졸업한 후 국비유학생으로 이집트 카이로대에서 공부했다. 귀국 후에는 외교부 공무원으로 건국 초기 중국의 아프리카 수교에 관여했다. 1963년 ‘법률조국’ ‘현실조국’인 중국을 떠나 ‘민족조국’ ‘감정조국’인 북한으로 아내와 함께 돌아가 교수가 됐다. 1974년 대외공작부서에 발탁돼 “조국통일 사업에 헌신할 의향”으로 공작원이 됐다. 공작원이 되기 위해선 출신 성분, 신체 조건, 지적 능력이 모두 뛰어나야 한다. 그는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 아랍어, 영어, 독일어 등에 두루 능통했다.

이집트 피라미드를 답사하는 정수일. 창비 제공

이집트 피라미드를 답사하는 정수일. 창비 제공

그는 ‘경계인’이라는 말을 싫어했다고 한다. ‘경계인’이란 말에서 경계를 핑계로 자기 마음대로 행동할 수 없는 불만을 토로한다는 뉘앙스를 읽었기 때문이다. 정수일은 주어진 조건에 불만을 제기하지 않고 그 안에서 최선을 다했다. 어린 시절의 가난에 불만을 품지 않았다. 베이징대 시절 반혁명분자를 심문하는 공안 경찰의 행동에 의문을 품지 않았다. 중국 당국의 유학 결정과 소환 결정, 북한 당국의 갑작스러운 공작원 제의에도 모두 따랐다. 훈련과 남파 기간 동안 가족을 만날 수 없다는 사실에 순순히 수긍했다. 교도소에서조차 조건에 순응해 불만 없이 공부했다. 한국에서 석방된 이후에는 남쪽의 법과 정서를 따랐다. 북의 가족과 연락하는 등 혹시라도 당국의 의심을 살 수 있는 행동은 철저히 피했다. “명령에 따라 떠났고, 명령에 따라 돌아”오는 삶이었다. 그는 “체제나 환경에 저항하지 않고 순응하였으며” “어떤 외부적 환경도 자신의 목표에 맞게 설정할 수 있었다.” 언어 능력보다 놀라운 것은 이러한 품성이다.

차병직은 정수일을 영웅 혹은 위인으로 미화하지만은 않는다. 하루 서너 시간만 자도 충분한 ‘쇼트슬리퍼’로서 수많은 저서와 번역서를 남겼지만, 석방 이후 지적 전성기가 지난 시기의 저술에는 학문적 엄밀성이나 객관성이 떨어진다고 지적한다.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았음을 인정하지 않는 노년기의 지적 태도도 언급한다. 당국의 권위에는 철저히 따랐지만, 출판 편집자에게는 양보가 없었던 면모도 드러낸다.

정수일이 유학, 외교관 생활을 하고, 공작원이 되기 위해 거쳐간 도시들. 창비 제공

정수일이 유학, 외교관 생활을 하고, 공작원이 되기 위해 거쳐간 도시들. 창비 제공

<일곱 개의 이름>은 20세기 중반 이후 중국, 아랍 국가, 북한 사회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역사서로서도 흥미진진하다. 조선어, 몽골어, 아랍어, 힌디어, 타이어, 인도네시아·말레이어, 베트남어, 미얀마어 학과가 있던 베이징대 동방학부의 대국적 풍모, 경제력 등 여러 면에서 한국을 압도하고 문화혁명기의 중국보다 활기찼던 북한의 1960년대, 프란츠 파농과 알베르 카뮈를 경유해 살펴보는 북아프리카와 아랍 국가의 반제국주의 움직임 등이 묘사된다.

체포 후 처음 접견한 변호사 박원순이 안기부의 간첩 조작을 의심하자 “(조작이 아니라) 전부 사실입니다”라고 말해 박원순을 당황케 했다는 일화도 재미있다. 새로운 국적과 이름을 얻기 위해 튀니지·모로코·말레이시아·호주·필리핀을 거치는 과정, 보고 방식을 보안이 어려운 팩스로 바꾼 북한의 의문스러운 지령 등은 스파이 스릴러 영화 소재로도 손색이 없다. 체제에 순응했지만 공부에는 집요했던 사람, 극단적인 환경 변화에 성실히 적응해 능력을 끌어낸 사람. 평전을 읽고 난 뒤 정수일에게서 받은 아주 잠정적인 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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