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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September 26, 2026

“화장실로 피하세요”…미국 명절 ‘생존 가이드’, 한국 못지않네 [이윤정 기자의 소소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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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과 가족 모임에 부담을 느끼는 것이 한국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미국정신의학회가 조사한 통계에 따르면  가족관계 자체가 스트레스 요인이 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뉴스이미지 사진 크게보기

명절과 가족 모임에 부담을 느끼는 것이 한국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미국정신의학회가 조사한 통계에 따르면 가족관계 자체가 스트레스 요인이 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뉴스이미지

“가족 모임에 가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나쁜 걸까요.” 언뜻 보면 명절을 앞둔 사람의 평범한 고민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사연은 지난해 11월 미국인 55세 여성이 경제매체 마켓워치 상담코너에 보낸 고민이다.

싱글 시스터라는 가명을 사용한 사연자는 지난해 추수감사절 가족 식사에서 돌려 말하는 비난과 무례한 발언이 이어졌다고 했다. 정치 이야기만은 피하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고, 정치적 견해 차이가 가족 간 다툼으로 이어졌다. 결국 그는 가족과의 식사가 즐겁기는커녕 지치고 불편한 자리였다고 털어놨다. 이후 가족 모임이 있을 때마다 “또 이런 일을 겪어야 하나”라며 괴로운 심정이라고 했다.

명절만 되면 왜 가족이 더 어려워질까

명절과 가족 모임에 부담을 느끼는 것이 한국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는 명절이 오히려 스트레스의 시간이 되는 건 만국 공통 현상이다. 미국정신의학회가 지난해 11월 미국 성인 220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는 응답자의 41%가 “올해 연말연시에 지난해보다 더 많은 스트레스를 받을 것으로 예상한다”고 답했다. 32%는 ‘까다로운 가족관계’가 걱정된다고 답했다. 명절에 가족과 친구를 만나는 일을 기대한다는 응답이 61%에 달했지만, 그 기대와 별개로 가족관계 자체가 스트레스 요인이 되는 사람도 적지 않았던 셈이다.

이런 고민이 특이한 사람 몇 명의 이야기에 그치는 것도 아니다. 미국 언론들은 지난해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가족 간 갈등과 스트레스를 잇달아 다뤘다. 워싱턴포스트는 지난해 11월 26일 “연휴가 스트레스를 준다”며 전문가에게 도움을 요청한 기자의 경험을 소개하면서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면 평소보다 많은 감정적·실질적 부담이 한꺼번에 생긴다고 전했다. ABC뉴스도 다음 날 추수감사절 식탁을 두고 일부 사람들이 농담처럼 ‘가족과 싸우는 슈퍼볼’이라고 부른다며 갈등을 피하는 방법을 소개했다.

심리학 전문지 사이콜로지 투데이도 추수감사절 시즌마다 가족 갈등을 다룬 글을 소개해왔다. 한 글은 “추수감사절이 두려운가”라고 묻고, 다른 글은 가족 모임이 즐거운 시간이 아니라 의무적이고 스트레스가 큰 자리로 느껴지는 사람들을 위한 대처법을 소개했다. 정치나 가족사를 둘러싼 논쟁을 피하고자 미리 대화의 경계를 정하고, 상대방의 행동까지 통제하려 하기보다 자신의 반응을 조절해야 한다는 조언이었다.

“그렇군요, 아! 저것 좀 주세요”…명절 갈등 피하는 생존법

미국 공영 라디오 WBUR도 지난해 11월 ‘추수감사절 생존 가이드’라는 제목의 방송을 내보냈다. 가족 간 복잡한 관계가 칠면조와 스터핑을 앞에 두고 갈등으로 번질 수 있다며, 가족과의 대화가 부담스러운 사람들을 위한 대처법을 소개했다. 심리치료사 제프 건터는 추수감사절에 만나는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사랑하는 가족이지만, 그렇다고 갈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현실적인 ‘생존가이드’를 통해 구체적 조언도 전했다. 건터는 가족이 정치나 가치관처럼 민감한 이야기를 꺼냈을 때 상대를 설득하려 하기보다 “우리는 생각이 많이 다르네요. 감자 좀 건네주세요”처럼 대화를 다른 방향으로 돌리라고 했다. 일부러 반응을 최소화하는 ‘그레이 록(gray rock)’ 기법도 소개했다. 상대의 도발이나 갈등에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마치 돌처럼 무덤덤하게 대응해 관심을 끊는 방법이다. 납득하기 어려운 말을 들을 때도 “그렇군요” “흥미롭네요” 정도로 짧게 답해 더 이상 논쟁할 틈을 주지 않는 것이다.

감정이 격해지면 설거지나 장보기 같은 일을 핑계로 잠시 자리를 피하거나 아이·반려견과 시간을 보내는 것도 방법으로 꼽았다. 화장실처럼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으로 잠시 피하는 것도 괜찮다고 했다. 그래도 가족 모임이 자신의 정서적 안정을 해칠 정도라면 아예 참석하지 않아도 된다고 조언했다. 전통을 지키는 것보다 자신의 상태를 돌보는 것이 우선이며, 친구들과 ‘프렌즈기빙’을 보내거나 집에서 영화를 보는 식으로 새로운 명절 방식을 만들어도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가족이면 명절에 꼭 만나야 할까

미국에서 ‘명절 생존 가이드’라는 말이 등장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영국 가디언에도 추수감사절이나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독성이 강한 가족을 명절에 꼭 만나야 하느냐”는 고민글이 자주 등장한다. 작가 크리스티나 와이먼은 매년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명절 생존 가이드’를 찾아봤다고 털어놨다. 가족 식탁에서 벌어지는 다툼을 피해 화장실에 숨어 있거나, 그저 저녁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라는 사람들을 묘사한 인터넷 밈도 넘쳐났다고 했다.

와이먼에게 코로나19는 뜻밖의 탈출구가 됐다. 이동 제한으로 가족을 만나지 않아도 되는 명분이 생겼기 때문이다. 페이스북과 레딧 등에는 가족 모임을 피하기 위한 핑계와 밈이 올라왔다. 그러면서 그는 오히려 한 가지 질문을 하게 됐다고 했다. 서구권에서도 명절이면 가족이 어떤 일이 있어도 함께해야 한다는 기대가 있지만, 성인이 된 자신이 가족과 함께 보내는 명절을 거절할 권리를 왜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느냐는 것이었다.

미국 버지니아주에서 활동하는 임상심리학자 린지 깁슨은 가디언에 가족의 유대를 지키기 위해 집으로 돌아가는 행동이 반드시 건강한 관계를 만드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집에 갈 때마다 서로 싸우고 미워하게 된다면 물리적으로 한자리에 있는 것이 오히려 관계를 지키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고 조언했다.

추수감사절과 추석은 음식도, 풍경도, 가족을 만나는 방식도 다르다. 하지만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인 가족 사이에서 묵혀둔 갈등이 튀어나오고, 만나지 않을 때보다 만날 때 더 지치는 사람이 있다는 점까지 다르지는 않다. 미국에서 ‘명절 생존 가이드’가 따로 등장할 정도라면, 명절에 가족을 만나는 일이 버거운 것은 어느 한 나라만의 특이한 풍경은 아닐지도 모른다. 명절에 꼭 모두가 행복해야 한다는 기대부터 내려놓는 것. 어쩌면 미국의 ‘생존 가이드’가 명절을 보내고 또 앞둔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현실적인 조언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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