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이(異)면]‘기름 넣는 전기차’ 쏟아진다는데…친환경일까, 캐즘이 낳은 ‘진통제’일까?
주유구는 분명히 있는데 엔진은 바퀴를 돌리지 않는다. 기름을 태워 전기를 만들고, 그 전기로 모터를 돌려 달린다. 가속 페달을 밟았을 때의 정숙성과 매끄러운 반응은 영락없는 전기차인데, 보닛 안에는 여전히 내연기관이 살아 숨 쉰다.
전기차 수요 둔화 현상(캐즘)의 골이 깊어지자 글로벌 완성차 업계가 새로운 카드를 꺼내 들었다. 이름도 다소 생소한 ‘EREV(Extended-Range Electric Vehicle·주행거리 연장형 전기차)’다. 현대자동차가 2027년 출시를 목표로 제네시스와 대형 SUV 차급에 EREV 도입을 공식화했고, 스텔란티스와 GM 등 글로벌 완성차 기업들도 속속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소비자들은 ‘전기차의 뛰어난 주행감에 내연기관의 주유 편의성을 합쳤다’는 소식에 호기심을 보인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면 기묘하다. EREV는 과연 친환경 미래차일까, 아니면 캐즘을 견디기 위해 급조된 과도기적 진통제일까.
구동축 분리…대형차 ‘배터리 악순환’ 끊다
도대체 EREV는 어떤 차일까. 일반 하이브리드(HEV)나 플러그인 하이브리드(PHEV)는 주행 상황과 속도에 따라 엔진과 모터가 바퀴를 번갈아 구동하거나 힘을 합친다. 반면 EREV는 기술적으로 ‘직렬 하이브리드’에 속한다. 엔진은 오직 배터리를 충전하기 위한 발전기 역할만 전담할 뿐 일반적으로 구동축과 분리돼 있다. 바퀴는 100% 전기 모터의 힘으로만 굴러간다.
완성차 업체들이 이 카드를 뽑아 든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대형차의 구조적 한계와 경제성 때문이다. 차체가 무겁고 공기 저항이 큰 대형 SUV나 픽업트럭을 순수전기차(BEV)로 만들 경우, 만족할 만한 1회 충전 주행거리를 뽑아내려면 100kWh를 훌쩍 넘는 대용량 배터리가 필요해질 수 있다. 하지만 배터리가 늘어날수록 차 중량은 무거워지고, 무거워진 차체 탓에 전비가 급락해 더 큰 배터리가 필요해지는 ‘중량과 원가의 악순환’에 빠진다.
EREV는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는 영리한 타협점을 제시한다. 순수전기차 대비 배터리 용량을 크게 줄이는 대신 소형 엔진과 발전기를 결합해 생산 원가와 중량 부담을 덜어낸다. 현대차 역시 순수전기차보다 배터리 용량을 절반 미만으로 줄이면서 엔진 발전기를 활용해 960㎞ 이상의 주행거리를 확보한다는 계획이다. 충전 인프라 부족에 시달리는 장거리 운전자와 원가 압박을 덜어야 하는 제조사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셈이다.
중국의 성공과 마진의 그늘…친환경 논란은?
리 오토가 올해 출시한 디 올 뉴 LI L9. 리 오토 홈페이지 갈무리
앞서 중국 시장에서는 리샹(Li Auto)이 대형 SUV EREV로 돌풍을 일으키며 글로벌 완성차들의 벤치마킹 모델이 됐다. 다만 EREV가 무조건적인 황금알을 낳는 것은 아니다. EREV 중심으로 성장한 리 오토는 최근 중국 내 가격 경쟁 심화와 원가 부담으로 차량 마진이 크게 압박받고 있다. EREV 역시 철저한 원가 절감과 대량 양산 능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수익성을 담보하기 어렵다는 냉정한 현실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친환경성에 대한 시선도 엇갈린다. EREV는 휘발유를 태워 전력을 만드는 만큼 주행 중 탄소 배출이 발생한다. 화석연료를 전기에너지로 바꾸고 이를 다시 운동에너지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손실도 피할 수 없다. 배터리에 충전된 전기로만 달리는 순수전기차와 동일한 의미의 ‘무배출차’로 보기는 어렵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엔지니어링 관점의 반론도 만만치 않다. 일반 내연기관차는 주행 상황에 따라 엔진 회전수와 부하가 수시로 변한다. 반면 EREV의 엔진은 구동축과 분리돼 있어 상대적으로 효율이 높은 운전 영역에서 발전기를 구동하도록 설계할 수 있다. 덕분에 일반 가솔린 차량보다 연료 소비와 배출가스를 줄이는 데 유리하다.
美·EU 규제 선회로 ‘생명 연장’…남겨진 숙제는
가장 흥미로운 반전은 글로벌 규제 지형이다. 당초 EREV는 각국의 탄소 규제 장벽에 걸려 몇 년 쓰이다 버려질 ‘시한부 기술’로 점쳐졌다. 하지만 2026년 현재 시장 기류는 사뭇 다르다. 미국에서는 연방정부가 자동차 온실가스 규제를 대폭 완화하면서 내연기관을 일부 활용하는 EREV에 상대적으로 우호적인 정책 환경이 조성됐다. 유럽연합(EU) 역시 2035년 이후 자동차 탄소 규제의 세부 방식을 둘러싸고 기술중립성을 확대하는 방안을 추진하면서 내연기관 기반 기술의 생존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EREV의 제도적 수명이 당초 예상보다 길어질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 것이다.
물론 대가는 남는다. 전기차 전환 과정에서 점진적으로 정리하려던 엔진, 배기 후처리, 연료탱크, 냉각계통 등 내연기관 부품 체계와 연구개발(R&D) 설비를 계속 안고 가야 한다. 시스템 복잡성이 커지는 만큼, 순수전기차 플랫폼과 소프트웨어(SDV) 혁신에 모든 자원을 쏟아붓는 테슬라나 비야디(BYD) 등 선도 기업들과의 미래 플랫폼 격차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는 숙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기름 넣는 전기차 EREV가 전기차 전환을 늦추는 미봉책일지, 아니면 충전 인프라의 한계와 배터리의 벽을 넘어 일반 대중을 전동화로 자연스럽게 이끄는 가장 현실적인 징검다리가 될 지는 미지수다. 과도기 속에서 완성차 업계의 생존 줄타기는 더 치열해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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