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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October 17, 2026

아, 이제 숨을 쉴 수 있겠다고 중얼거렸다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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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책 출간 30돌을 맞은 전경린 작가. “고독의 극지”에서 소설을 쓰며 살기로 마음먹었다는 30대 초반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문학동네 제공
첫 책 출간 30돌을 맞은 전경린 작가. “고독의 극지”에서 소설을 쓰며 살기로 마음먹었다는 30대 초반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문학동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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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올린 손바닥이 뜨거웠다. 전후의 기억은 사라지고 없지만, 내가 지내던 산속 집까지 며칠이나 걸려 우편으로 도착했을 책이 왜 뜨거웠을까? 30년이 지난 지금도 손바닥 위에 책 자국이 나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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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초반에 이르렀을 때 나는 소설을 쓰며 살기로 마음먹었었다. 글쓰기는 바깥과 나의 내면세계를 연결하는 창구였고, 내가 세상에 존재할 방법이었다. 그때 나의 자아는 더는 물러날 곳 없는 고독의 극지에 있었던 것 같다. ‘우리가 고독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은 그 부름에 응답하는 자신의 표현 활동을 통해서 뿐이다’라고 한 일본의 철학자 미키 기요시의 말에 나는 동의한다. 달리 어떤 대상도 내 고독을 초월하게 만들지 못한다.

90년대를 돌아볼 때 흔히 문화의 르네상스 시대라고 한다. 나에게 90년대는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과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불러일으킨 동요와 균열을 지나, 한국문학에 오래 억눌려 있었던 사적 서사, 내면적 서사, 여성 화자의 서사가 새로운 감수성을 담고 소설의 장을 펼치면서 그 문이 열렸다. 아, 이제 숨을 쉴 수 있겠다고 중얼거렸던 기억이 난다. ‘염소를 모는 여자’는 그 첫 숨과 함께 시작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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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남쪽 끝 지방에서 살았다. 문학과 소설 창작의 언저리에 있지도 않아서 별다른 체계도 없이 수중에 들어오는 대로 책을 읽었다. 하지만 책과 독자 사이에는 어떤 신비가 있어서 척박했던 80년대에도 마치 누가 고르고 골라 보내준 것처럼 필요한 책이 수중에 들어왔었다. 아직도 나의 책장에 있는 프랑스 대표 문학상 수상작 모음인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는 김화영 선생님이 번역해 1980년에 출간한 과학과 인간사라는 출판사 판본이다. 하인리히 뵐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1984년에 나온 학원사 판본이고, 시몬 드 보부아르의 ‘위기의 여자’는 1986년 오상 출판사 판본이다. 책값이 2000원, 2500원이던 시절이다. 이런 책들을 누구 못지않게 일찍 읽었다는 사실은 작가가 된 뒤에 알게 되었다. 그 책들은 나의 염원처럼 멀고 좁고 어두운 틈으로 흘러들어와 20대의 감수성을 돌봤고, 암울했던 시대를 견디게 했고, 남몰래 ‘염소’를 키우게 했다.

염소를 모는 여자 l 전경린 지음, 문학동네(1996, 개정판 2014)
염소를 모는 여자 l 전경린 지음, 문학동네(1996, 개정판 2014)

1996년에 출간된 ‘염소를 모는 여자’는 느리지만 꾸준하게 재쇄를 찍다가 2014년에 개정판이 나왔다. 나는 추상적으로 표현된 예전 책의 표지를 무척 좋아했는데, 지금 내 책장엔 꼭 한권이 있을 뿐이다. 이 책엔 출간된 해에 한국일보 문학상을 안겨준 표제작 ‘염소를 모는 여자’와 KBS TV 문학관 드라마로 제작된 ‘안마당이 있는 가겟집 풍경’, 동아일보 신춘문예 등단작인 ‘사막의 달’과 내가 소중히 여기는 ‘꽃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 등 여덟편의 중단편이 실렸다. 그리고 황현산 선생님의 귀한 해설이 들어 있다. 소설 속에서 한 여자가 검은 우산을 쓰고, 염소를 몰고 아파트를 빠져나간다. 염소는 무엇인가? 우리 모두에게 내재한 야생적 본성이자 고유한 자아라고 할 수도 있고, 세상에서 고립된 한 여자가 자기 세계를 찾아가도록 추동하는 매개물일 수도 있다. 누구에게나 그런 것이 있지 않을까. 나에게 그것은 글쓰기였다.

새뮤얼 존슨은, 책은 각자 존재에서 벗어나게 해주거나, 존재를 견딜 방법을 가르쳐주어야 한다고 했다. 나는 긴 세월 동안 다른 책들과 교감하면서 때로는 벗어나기 위해, 때로는 견디기 위해 글을 읽고 써왔다. 오랜만에 내 첫 책의 차례 페이지를 보고 있으니 마음이 뻐근하게 뭉친다. 이렇게나 간절한 때가 있었다.

전경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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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다음 책들

내 생애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

1998년 동아일보에 ‘구름 모자 벗기 게임’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 후 500매 정도의 초고를 1200매로 재창작해 1999년에 출간한 장편 소설이다. 연재할 당시에 생긴 열혈 독자들이 매일 출근길에 거리의 매대에서 신문을 사 회사에서 몰래 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작가로서 나는, 생의 의욕을 완전히 잃고 무력감에 빠져버린 ‘미흔’을 흔들어 깨우고, 스스로 살고 싶은 공간으로 옮겨 새로운 숨을 쉬게 하는 데 주력했었다.

문학동네(1999)

검은 설탕이 녹는 동안

소리와 냄새 같은 감각과 우울과 결핍과 몽상, 이해를 바라지 않는 충동적인 행위들과 스무살을 중독시키는 단어들과 위험한 연극의 무대가 소설을 이끌어간다. 아마도 스무살의 감수성에 주력한 이런 특징이 24년이 지난 지금도 1, 2년 간격으로 조금씩이나마 중쇄를 찍게 하는 이유가 아닐까. “한국문학은 이제 제대로 된 청춘의 비망록을 가지게 되었다”라고 써주신 서영은 선생님의 표사가 소중하다.

문학동네(2002)

자기만의 집

2007년에 출간했던 ‘엄마의 집’을 2025년 다산북스에서 복간하며 제목을 바꾸었다. 힘겹고 아픈 이야기 속에서 화자인 호은이 너무 씩씩해서 눈물겹다. 아버지가 재혼해 생긴 딸을 갑자기 전처인 엄마 집에 맡기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들은 어색하게 부대끼는 과정을 지나 서로의 이야기를 따뜻하게 공유하고, 또 흩어지며 각자의 모습으로 자기 삶을 살아간다. 이 소설에서 집은 인생의 비유이기도 하다.

다산책방(2025)

천 개의 웃음과 눈물의 낙원

올해 나온 최근작이며, 동화 같은 내용의 작은 책이다. 60여년의 시간이 작용한 유년은 내 안에서 형체를 잃고 녹아 존재의 바닥을 감싸는 광휘로 떠오른다. 여러 가지 궁리를 했지만, 어린 자신을 ‘새별이’라고 부르는 화자를 서두에 세우고서야 자유롭게 이야기를 만들 소설적 공간을 갖게 되었다. 어린 시절의 나와는 너무 다른 캐릭터인 ‘새별이’도 그렇게 해서 왔다. 기억과 꿈과 상상은 같은 질료라고 한다. 이 질료들과 내 안의 광휘가 섞여 ‘새별이’의 반짝임으로 되살아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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