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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September 12, 2026

천주교 박해 속 ‘근대 출판’ 태동...145년 전 성서활판소가 뿌리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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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가 지난 4일 서울 중구 중림동 가톨릭출판사 본관 1층 현관에 전시된 활판 인쇄기를 촬영한 뒤 인공지능 챗지피티에 “인쇄기 사진을 토대로 명동대성당과 식자된 활판을 함께 그려줘”라는 지시어를 입력해 생성한 이미지. 천주교 성서활판소(1911년 경향잡지사로 개명, 1958년 가톨릭출판사로 개명)는 1885년 서울 정동에서 1888년 지금의 명동대성당 파밀리아 채플 자리로 이전했다가, 1979년 지금의 서울 중림동에 터를 잡았다. 사진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그래픽 김은정 기자 ejkim@hani.co.kr
한겨레가 지난 4일 서울 중구 중림동 가톨릭출판사 본관 1층 현관에 전시된 활판 인쇄기를 촬영한 뒤 인공지능 챗지피티에 “인쇄기 사진을 토대로 명동대성당과 식자된 활판을 함께 그려줘”라는 지시어를 입력해 생성한 이미지. 천주교 성서활판소(1911년 경향잡지사로 개명, 1958년 가톨릭출판사로 개명)는 1885년 서울 정동에서 1888년 지금의 명동대성당 파밀리아 채플 자리로 이전했다가, 1979년 지금의 서울 중림동에 터를 잡았다. 사진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그래픽 김은정 기자 e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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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구 중림동 가톨릭출판사 본관 1층 현관에는 고색창연한 인쇄기 한대가 놓여 있다. 커다란 휠(구동 바퀴), 잉크 디스크와 롤러, 활자판이 달린 활판인쇄기다. 지금은 출판사의 역사를 보여주는 전시물이지만, 100년 전에는 다수의 인쇄물을 찍어내던 한국 근대 출판 역사의 유산이다.

2018년 2월 출판사 사장으로 부임한 김대영 신부는 인쇄기를 바라보다 문득 궁금해졌다. ‘이 인쇄기는 언제 무엇을 인쇄하던 것일까?’ 궁금증은 출판사의 역사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정리된 자료는 많지 않았다.

김 신부는 2019년부터 출판사와 관련된 역사 자료를 직접 찾아 검토하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거창한 역사 연구를 계획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자료를 따라가다 보니 이야기는 출판사 한곳의 울타리를 한참 넘어섰다.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유럽과 아시아를 오간 가톨릭 선교의 흐름, 중국에서 조선으로 들어온 서학(서양 학문) 서적들, 조선 사람들이 그것을 읽고 번역하고 필사한 과정, 인쇄와 출판을 통해 지식과 신앙이 확산하는 역사가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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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신부는 지난 3일 한겨레와 한 서면 인터뷰에서 “출판사의 역사를 정리해보자는 생각으로 시작한 일이었는데 자료 조사를 할수록 더 많은 이야기와 의미를 발견하게 됐다”고 했다. “출판과 인쇄라는 매개를 통해 한국과 유럽의 선교 문화가 서로 만나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섞여가는 과정이 무척 흥미롭게 다가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혼자 힘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자료가 방대했다. 연구해야 할 분야도 폭넓었다. 2020년에 출판사 직원들과 함께 ‘가톨릭출판사 역사연구회’(이하 연구회)를 꾸린 이유다. 국문학·신학·철학을 전공한 직원들이 참여해, 한달에 한두차례씩 자료를 읽고 토론했다. 그렇게 시작된 궁금증이 한권의 책으로 나오기까지 꼬박 6년이 걸렸다. 지난달 28일 가톨릭출판사 창립 145주년에 맞춰 출간된 ‘조선 천주교 출판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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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천주교 출판사 l 가톨릭출판사역사연구회 지음, 가톨릭출판사, 3만3000원
조선 천주교 출판사 l 가톨릭출판사역사연구회 지음, 가톨릭출판사, 3만3000원

17세기, 서학이 조선에 들어오다

책은 신앙의 역사 너머로 시야를 넓힌다. 중국에서 한문으로 출판된 책들이 조선에 유입되고, 이를 읽은 조선의 지식인과 신자들이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고, 다시 우리말로 옮긴 필사본을 신자들에게 전하고, 책의 수요가 급증하자 목판에 이은 활판인쇄본을 만들어 보급한 과정이 장대한 흐름으로 이어진다.

우리나라에서 기독교 신앙의 전파는 프랑스 외방전교회 신부들의 선교 열정과 조선 지식인들의 지적 탐구욕이 만난 결과였다. 그 시작은 17세기 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앞서 16세기 말, 서양 선교사들은 중국에 서양 지식과 문물을 소개하며 천주교를 전했다. 특히 예수회는 현지 문화를 인정하고 맞춤형 전교를 하려는 ‘적응주의’ 전략을 펼쳤다. 이들이 한문을 배워서 펴낸 저작물(437종)은 종교 서적(251종)뿐 아니라 윤리·지리·천문·역사·과학기술 등 다양한 분야를 아울렀다.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 ‘교우론’, ‘곤여만국전도’가 그 일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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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판 한문 서학서들은 금세 조선으로 유입됐다. 그 물결에 천주교 교리와 성경도 있었다. 학구파 문신 이수광은 ‘지봉유설’(1614년)에서 ‘천주실의’를 최초로 언급했다. “그 학문은 오로지 천주를 존숭하는데, 천주란 곧 유가(儒家)의 상제(上帝)이며, 공경하고 섬기며 두려워하며 믿음은 불씨(佛氏)가 석가를 대함과 같다. 천당지옥설을 권징(권선징악)한다. (…) 예수는 서양에서의 구세주다.”

서학은 이익의 제자들을 통해 후대로 이어졌다. 이익의 호를 딴 성호학파는 뒷날 한국 천주교의 자생적 씨앗이 싹틀 토양이 됐다. 이병휴·홍유한 등 2세대, 이병휴의 제자 권철신·이기양 등 3세대에 이어, 이벽·이승훈·정약전·정약용 등 4세대가 학맥을 이어갔다.

한겨레가 인공지능 챗지피티에 “천주교가 박해받던 조선 시대, 천주교 서적을 몰래 필사하며 교리를 배우던 서민들의 모습을 그려줘”라는 지시어를 입력해 생성한 이미지.
한겨레가 인공지능 챗지피티에 “천주교가 박해받던 조선 시대, 천주교 서적을 몰래 필사하며 교리를 배우던 서민들의 모습을 그려줘”라는 지시어를 입력해 생성한 이미지.

1794년에는 최초의 외국인 사제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들어왔다. 그는 교회 조직화 사업으로 평신도 단체 ‘명도회’를 설립했는데, 초대 회장이 정약종이었다. 다산 정약용의 둘째 형이다. 조선 학자들이 ‘지식’으로 받아들인 서학은 기층 민중에게서 ‘신앙’으로 확산했다. 조정이 천주교를 유교적 질서와 왕권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해 박해하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다. “명도회 설립 당시 회원들 가운데 부녀자가 3분의 2, 천민이 3분의 1을 차지했는데, 양반 지식층들은 세상의 화가 두려워 믿고 따르는 자들이 극히 적었기 때문이다.”(1801년 황사영 백서)

박해 피할 전교, ‘책’이 필요했다

박해가 거듭되면서 신자들과 외국인 성직자들의 체포와 처형이 이어졌다. 신자들이 모여 직접 교리를 배우기가 갈수록 어려워졌다. 책이 필요했다. 그러나 필사본 제작은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고 생산량은 한참 모자랐다. 천주교 신부들이 직접 한글과 우리말을 배우고 인쇄 출판에 눈을 돌린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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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천주교 대목구(오늘날 대교구)의 제4대 목구장 베르뇌 주교가 직접 천주교 서적의 출판과 보급을 이끌었다. “매년 한번, 잠깐 동안밖에 볼 수 없는 신자들을 우리가 직접 가르칠 수 없으므로, 우리는 이것을 할 수 있는 대로 책을 보급시킴으로 보충하려 한다”(1858년, 베르뇌 주교 사목 서한).

1861년에는 한양에 목판 인쇄소가 설립됐다. 베르뇌 주교는 한글을 조선 천주교가 간행하는 인쇄 출판물의 공식 언어로 지정했다. 대중 선교의 현실적 필요성 때문이었다. 다행히 “거의 모든 천주교인은 알파벳식 글자로 된 그들의 말을 읽고 쓸 줄 아는데, 어린아이들도 매우 빨리 배운다”(클로드 샤를 달레, ‘한국천주교회사’, 1874).

프랑스 선교사들이 편찬한 국내 최초의 2개어 사전 ‘한불자전’(1880, 왼쪽)과 우리말 문법서 ‘한어문전’(1881). 한국가톨릭대사전 누리집, 국립한글박물관
프랑스 선교사들이 편찬한 국내 최초의 2개어 사전 ‘한불자전’(1880, 왼쪽)과 우리말 문법서 ‘한어문전’(1881). 한국가톨릭대사전 누리집, 국립한글박물관

그 무렵 일본 요코하마에 있는 프랑스계 민간 활판인쇄소에서는 한국 출판 역사에 굵은 획을 새긴 출판물이 나왔다. 리델 주교가 시작하고 코스트 신부가 마무리한 최초의 우리말-외국어 사전 ‘한불자전’(1880)과 최초의 한국어 문법서 ‘한어문전’(1881)이다. 프랑스 선교사들이 선교를 위해 조선말을 익히려는 목적이었지만, 뒷날 한국어 사전 편찬의 중요한 원천이 됐다. 최초의 국어사전은 1911년 주시경 등이 편찬한 ‘말모이’였으나 출간에 이르지는 못했다. 앞서 1897년 캐나다의 개신교 선교사 제임스 게일의 ‘한영자전’도 코스트 신부의 ‘한불자전’을 기초 자료로 삼았다.

이듬해인 1881년 8월에는 서양의 최신 활판인쇄술을 구현한 조선 천주교 대목구의 독자적 인쇄소인 성서활판소가 요코하마에 설립됐다. 현재 가톨릭출판사의 뿌리가 바로 그 인쇄소다. 1883년 8월 조선 왕실이 한국 최초의 근대식 인쇄소이자 언론·출판 기관인 박문국을 설립해 ‘한성순보’를 찍기 2년 전이었다.

명동대성당 자리에 성서활판소

조선 대목구는 요코하마 성서활판소를 나가사키로 옮겼다가 1885년 11월 조선 한양으로 들여왔다. 첫 자리가 새문안 정동이었고, 이듬해 종현(현재 명동대성당 자리)에 둥지를 틀었다. 성서활판소의 국내 이전과 운영에도 코스트 신부가 큰 몫을 했다. 이후 성서활판소는 ‘경향잡지사’(1911년)로 개명했다가 1958년 가톨릭출판사로 거듭났다. 지금의 중림동 사옥으로 이전한 것은 1979년이다.

프랑스 선교사들과 조선의 지식인·민중이 짧게는 145년, 길게는 400여년에 걸쳐 빚어낸 역사를 알기 쉽게 정리하기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신간 ‘조선 천주교 출판사’는 그 복잡다단한 과정을 학계 전문가가 아닌 비전문 평신도들이 연구모임을 꾸리고, 자료를 찾아 모으고, 서로 맞춰가며 검증하고, ‘조선 천주교의 인쇄와 출판’에 초점을 맞춰 조리 있게 서술했다는 점에서 돋보인다.

가톨릭출판사 본관 현관에는 1860년대 조선에서 선교 활동을 한 리델 주교(가운데 앉은 사람)와 신자들의 사진(왼쪽)과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코스트 요한 신부의 동판 초상(오른쪽)이 전시돼 있다. 코스트 신부는 1880~1881년 일본 요코하마에서 리델 주교가 탈고한 ‘한불자전’과 ‘한어문전’의 출간을 마무리한 뒤 1885년 성서활판소를 조선 한양의 정동으로 이전했으며, 1888년 종현(현재의 명동대성당 자리)로 재이전해 인쇄·출판 활동을 이어갔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가톨릭출판사 본관 현관에는 1860년대 조선에서 선교 활동을 한 리델 주교(가운데 앉은 사람)와 신자들의 사진(왼쪽)과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코스트 요한 신부의 동판 초상(오른쪽)이 전시돼 있다. 코스트 신부는 1880~1881년 일본 요코하마에서 리델 주교가 탈고한 ‘한불자전’과 ‘한어문전’의 출간을 마무리한 뒤 1885년 성서활판소를 조선 한양의 정동으로 이전했으며, 1888년 종현(현재의 명동대성당 자리)로 재이전해 인쇄·출판 활동을 이어갔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자료는 생각보다 훨씬 방대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살펴봐야 할지부터, 어떤 기준으로 정리하고 해석할지까지 모든 게 막막했습니다.”(김대영 신부) 그래도 연구회는 한달에 한두차례씩 만났다. 2020년부터 2026년까지 6년 동안 자료를 모으고 회의했다. 본격적인 초고가 나온 것은 2023년이었다. 초고가 완성됐다고 일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이후 3년 동안 원고를 다시 읽고, 덜어내고, 보완하고, 교정했다.

“처음에는 자료를 하나라도 더 넣고 싶은 마음이 컸는데, 시간이 지나면서는 오히려 무엇을 덜어내고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가 더 중요한 작업”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겹치는 내용과 비슷한 자료를 하나의 흐름으로 만드는 데 다시 시간이 필요했다. 각자 맡은 부분을 쓰되 원고가 나오면 모두가 함께 읽었다. 서로 수정하고 보완하면서 전체 흐름을 맞췄다. 역사 연구이면서 동시에 집단적인 편집 작업이었다.

전문 연구자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한 한계였다. 김 신부는 “특히 자료가 정확한지,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판단하는 일이 어려웠다”고 했다. “새로운 해석을 내놓기보다 기존 연구와 자료를 충실하게 확인하고 정리하는 데 무게”를 둔 이유다.

그 과정에서 전문가의 감수는 필수였다.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조광 고려대 명예교수의 검토와 도움말이 큰 힘이 됐다. 김 신부는 “자료를 살펴보고 원고를 작성하면서 저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나 역사적으로 확인이 필요한 부분에 대해 (조광 교수가) 많은 조언을 해주셨다”고 밝혔다.

지난달 서울 중구 중림동 가톨릭출판사 본관 전경. 조일준 선임기자
지난달 서울 중구 중림동 가톨릭출판사 본관 전경. 조일준 선임기자

비전문가들의 열정이 복원한 출판 역사

비전문가들이 느낀 한계는 역설적으로 새로운 관점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김 신부는 “특정한 연구 방법론에 한정되지 않고, 인쇄와 출판이라는 저희 나름의 관점에서 자료를 연결해볼 수 있었다”며 “조금은 자유롭고 열린 시각으로 자료를 바라볼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신앙의 선조들과 프랑스 선교사들의 노력뿐 아니라, 그들과 함께 일했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평신도들의 역할까지도 조금이나마 찾아내고 기록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보람을 느낀다고도 했다.

김 신부는 “자료를 찾아보고 공부하면서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중국에서 간행된 한문 서학서들이 조선에 들어오고 그것이 번역되어 신자들에게 전해지는 과정에서 가톨릭 신앙뿐만 아니라 한글의 쓰임과 역할도 상당히 확장되었다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책과 인쇄가 신앙 전파의 중요 수단이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언어와 문화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란 이야기다.

이번 ‘조선 천주교 출판사’는 그런 전통을 이어받고, 이후 관련 연구에도 중요한 통찰과 과제를 남긴 징검돌이 될 전망이다. 김 신부는 “이 책은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뿐 아니라, 한국의 근대 출판과 한글의 역사라는 측면에서도 생각해볼 수 있다”고 했다.

“프랑스 선교사들의 저작물은 단순히 신앙을 전하는 것을 넘어 우리말과 한글을 연구하고 기록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박해의 상황에서도 이어졌던 선교사들의 한글 연구와 언어학적 노력, 나아가 그들이 세계 여러 지역에서 현지 언어를 배우고 연구하고 기록한 역사에 대한 더 많은 연구가 이뤄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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