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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October 31, 2026

[단독] 연산군이 흥청대던 탕춘대, 겸재 그림 속에 처음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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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이 그린 ‘탕춘대’. 한가운데가 탕춘대, 위 왼쪽이 북한산 보현봉, 위 오른쪽이 형제봉, 아래가 홍제천이다. 아래 왼쪽 끝이 현재의 세검정 자리다. 영남대 박물관 소장
정선이 그린 ‘탕춘대’. 한가운데가 탕춘대, 위 왼쪽이 북한산 보현봉, 위 오른쪽이 형제봉, 아래가 홍제천이다. 아래 왼쪽 끝이 현재의 세검정 자리다. 영남대 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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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경복궁에 가서 대비에게 잔치를 열어드렸다. 잔치가 끝나자 행차말(내구마) 1천 필을 끌고 오게 해서 흥청(기생)을 싣고 탕춘대에 갔다. 왕이 길가에서 궁녀(나인)와 간음했다.”(‘연산군일기’ 1506년 7월7일)

연산군이 호화로운 이궁(별궁)을 짓고 방탕하게 놀던 곳, 탕춘대. 실록으로만 존재하던 그 언덕을 담은 그림이 처음으로 세상에 드러났다. 영남대 박물관이 소장한 겸재 정선의 그림이다. 이 그림은 그동안 ‘만춘도’(晩春圖), 늦은 봄을 그린 그림으로 알려져 왔다. 한겨레21 확인 결과 그림의 진짜 이름은 ‘탕춘대’(蕩春臺)였다. 그림 속 풍경도 늦봄이 아니라, 지금 서울 종로구 신영동 월드캐슬 빌라가 들어선 탕춘대 언덕과 홍제천, 북한산 보현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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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림체 한 글자 잘못 읽어

이름이 뒤바뀐 까닭은 그림 오른쪽 위에 초서와 행서가 섞인 흘림체로 쓴 화제(그림 제목)를 누군가 잘못 읽었기 때문이다. 서화 전문가인 전종주 호남대 명예교수는 “그림 제목에서 탕(蕩)자와 춘(春)자가 초서로 쓰여 알아보기 어렵다. 소장자가 이 그림을 분류할 때 한자를 잘 모르는 사람이 제목을 붙인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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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 그림 ‘탕춘대’의 현재 모습. 가운데 빌라가 들어선 곳이 탕춘대, 왼쪽 위에 북한산 보현봉, 오른쪽 위 형제봉, 아래가 홍제천. 김규원 선임기자
정선 그림 ‘탕춘대’의 현재 모습. 가운데 빌라가 들어선 곳이 탕춘대, 왼쪽 위에 북한산 보현봉, 오른쪽 위 형제봉, 아래가 홍제천. 김규원 선임기자

그림 아래 왼쪽의 샛길은 지금 넓혀져 세검정로가 됐다. 샛길 너머 건물은 장의사와 총융청이 있던 자리로, 지금은 세검정초등학교가 들어서 있다. 맨 왼쪽 아래 홍제천 가의 낮은 벼랑은 현재 세검정이 선 자리다. 책 ‘옛 그림으로 본 서울’의 저자인 최열 미술사학자는 “지금은 이 일대에서 세검정만 볼 수 있는데, 평평한 바위 언덕인 탕춘대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유일한 작품”이라고 말했다. 윤진영 동덕여대 겸임교수(한국 회화사)도 “도시화 이전 세검정 일대의 원형 지형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정작 그림에는 이 일대의 상징인 세검정이 없다. 세검정이 들어서기 전에 그려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김상채의 문집 ‘창암집’에 따르면 세검정은 1747년에 세워졌다. 정선의 2점을 비롯해 세검정을 담은 그림들은 모두 1747년 이후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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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의 ‘세검정’. 세검정 뒤쪽 언덕이 탕춘대, 오른쪽이 홍제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정선의 ‘세검정’. 세검정 뒤쪽 언덕이 탕춘대, 오른쪽이 홍제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최열 미술사학자는 “나무와 숲 스타일, 점묘법,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구름띠 등 여러 요소가 겸재의 화풍을 잘 보여준다. 생략이 없고 사실에 충실한 것은 실경산수에서 진경산수로 넘어가기 전 정선의 전기 작품임을 드러낸다”고 평가했다. 실경은 사실 그대로, 진경은 대상의 본질을 드러내기 위해 화가가 재구성해 그린 그림이다.

영남대 박물관 “명칭과 설명 개정하겠다”

영남대 박물관의 강중휘 학예연구사는 “소장품 카드에 적힌 기록에 따라 그림 제목을 ‘만춘도’로 관리해왔다. 그러나 한겨레21의 요청에 따라 다시 확인해보니 ‘탕춘대’가 정확한 이름이다. 앞으로 소장품 명칭과 관련 설명을 개정하겠다”고 밝혔다. 이 그림은 영남대의 전신인 청구대 설립자 최해청 선생이 1973년 기증한 뒤 정선의 ‘만춘도’로 알려져 왔다.

권신응이 그린 ‘세검정’. 세검정 뒤 언덕 위에 ‘탕춘대’라는 한자가 적혀 있다. 개인 소장
권신응이 그린 ‘세검정’. 세검정 뒤 언덕 위에 ‘탕춘대’라는 한자가 적혀 있다. 개인 소장

탕춘대는 장의사(세검정초) 부근, 홍제천이 휘감아 흐르는 긴 언덕이다. 이름 없던 이 언덕에 연산군이 ‘산수가 기묘하게 좋다’며 탕춘대라는 이름을 붙였다. 탕(蕩)은 방탕하다는 뜻이고, 춘(春)은 봄이지만 섹스나 술을 뜻하는 말로도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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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은 1506년 1월 탕춘대에 긴 회랑을 두르고 청기와를 얹은 ‘탕춘정’(蕩春亭)을 지었다. 언덕 아래 홍제천에는 다리집(횡각)을 짓고 물을 막아 놀이터로 만들었다. 이 글 첫머리처럼 탕춘대에서 온갖 지저분한 일을 벌이던 연산군은 그해 9월 중종반정으로 쫓겨났다. 버려졌던 탕춘대는 숙종~영조 때 군사 시설로 다시 태어났다. 병자호란을 거울삼은 숙종은 1715~1719년 북한산성과 한양도성을 잇는 ‘탕춘대성’을 쌓았다.

봄 즐기는 곳이 군사 훈련장 ‘연융대’로

영조는 1747년 북한산성과 탕춘대성을 지킬 총융청을 장의사와 탕춘대 터로 옮기고, 같은 해 탕춘대 아래에 세검정을 지었다. 인조반정 때 반정군이 이곳에서 칼을 씻었다는 전설이 있지만, 1747년 지은 정자에 1623년의 사건을 갖다 붙인 이야기다. ‘세검정’은 통영 ‘세병관’(洗兵館)처럼 전쟁을 끝내고 무기를 씻어 평화로운 시대를 연다는 뜻이다.

영조는 1754년 “(연산군이 붙인) 탕춘대의 이름이 바르지 않다”며 탕춘대를 ‘연융대’(鍊戎臺)로 고쳤다. ‘봄(섹스, 술)을 즐기는 곳’이 ‘군사 훈련장’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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