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갈아 넣어서 이혼은 막고 싶다…“가진 것 없는 게” 폭언에도 [.txt]
결혼한 지 3년 된, 곧 두돌을 앞둔 한 아이의 아빠입니다. 저는 결코 아이를 한부모 가정에서 키우고 싶지 않은데 아내는 이혼하자고 합니다. 아내의 불만은 제 집안에서 비롯됩니다. 아내는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반면 저희 집은 아버지의 사업이 망하면서 가세가 크게 기울었습니다. 아버지는 신용불량자 신세가 됐고 저는 아르바이트와 학자금 대출로 겨우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이 상황을 아내도 다 알고 결혼했는데 막상 살아보니 생각이 바뀐 모양입니다. “가진 것도 없는 게”, “나 때문에 이 정도 누리고 사는 주제에”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삽니다. 신혼집에 아내의 돈이 많이 들어간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아내가 그 이유로 생활비는 한푼도 낼 수 없다고 해서 생활비, 시터비, 해외여행비, 처가 가족행사 같은 데 필요한 돈을 다 제 월급으로 충당하고 있습니다. 제 월급이 적지 않은 편인데 씀씀이 큰 아내가 명품을 자주 질러 월급이 다 카드값으로 나갑니다. 저렇게 써대면서 저에게 모은 돈이 왜 이거밖에 없냐고 화를 냅니다. 한번은 억울해서 “결혼할 때 가져온 건 없지만 그만큼 생활비 많이 주지 않았냐”고 따졌더니 “내 집에서 나가”라는 말이 돌아왔습니다.
처음에는 아내가 산후우울증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내 쉬라고 새벽 수유도 제가 했습니다. 지금도 아이 반찬 만들기, 밥 먹이기, 목욕시키기 다 제가 합니다. 아내가 집안일로도 폭발하기 때문에 청소며 빨래도 제가 합니다. 아내는 그런데도 저랑 못 살겠다며 이혼하자고 합니다.
저는 저를 더 갈아 넣어서라도 이혼만은 막고 싶습니다. 아이에게 상처를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걸핏하면 ‘한부모 가정 아이라서’라는 낙인이 따라붙을 텐데 그걸 만들어주고 싶지 않습니다. 아이를 위해 어떻게든 이 불화를 극복하고 싶은데 아내는 저와 대화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김태현(가명·35)
사연을 읽으니 영화 ‘위플래쉬’가 떠오릅니다. 일류 드러머를 꿈꾸는 앤드류, 천재적인 재능 못지않게 파괴적인 성품을 지닌 플레처 교수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입니다. 플레처는 자신이 직접 앤드류를 캐스팅해놓고도 절대 칭찬해주는 법이 없습니다. 윽박지르고 조롱하고 망신 주면서 다른 드러머들과 잔인한 경합을 붙입니다. 손찌검까지 서슴지 않으며 제자를 극단으로 몰아붙입니다. 박자가 안 맞는다고 앤드류의 뺨을 갈기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앤드류는 그럴수록 더 악착같이 연습합니다. 트럭에 치여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병원이 아닌 공연장으로 달려갈 정도입니다. 모멸감을 느끼면서도 어떻게든 아내의 요구를 충족시키려고 하는 태현님의 모습과 겹칩니다.
무시하는 말을 계속 듣다 보면 자기 의심이 싹틉니다. “가진 것도 없는 게”, “나 때문에 이 정도 누리고 사는 주제에”라는 말을 계속 들으면 누구라도 ‘내가 정말 아무것도 아닌가?’, ‘내가 정말 저 사람 없이 혼자서는 못 사는 사람인가?’ 하는 의심이 들 것입니다.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싶은 오기도 생길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부부 사이에 위계가 생겼습니다. ‘내 덕에 살고 있으니 내 말에 토 달지 말라’는 아내의 고압적 태도와 ‘나는 네 덕으로만 사는 무능한 사람이 아니다’라는 태현님의 자기 증명은 그 위계를 유지하는 두 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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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이런 위계가 있었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아내가 집에 돈을 더 보탠 것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으로 생활비와 육아를 더 맡기 시작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는 아내의 평가가 마음 깊이 파고든 것 같습니다. 실제로는 가정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하고 있지만 이런 사실도 아내의 혹평을 떨쳐내기에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나를 가장 심하게 깎아내리는 사람이 나의 가치를 확인해줄 사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아내의 인정은 태현님에게 남다를 것입니다. 아내는 태현님의 사정을 다 알고도 태현님을 선택했습니다. 그 선택이 태현님에게는 경제적 조건이 아니라 삶의 고비를 넘으려는 노력과 성실함을 알아봐준 것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다 돌연 태현님을 무능한 사람처럼 대하기 시작했다면 그동안 지탱해온 삶의 방식 자체가 깡그리 부정당하는 느낌이 들 수도 있습니다. ‘오뚝이 같은 근성으로 어떤 좌절도 다 이겨낼 의지가 있는데 그것만으로 이 세상은 안 되는 건가?’ 하는 허무와 혼란이 클 것 같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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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맥락을 따라가면 아이를 위해 가정을 지키려는 노력이 왜 이렇게 필사적일 수밖에 없는지 이해가 됩니다. 집안이라는 배경을 넘어서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다했지만 결국 그 배경으로 인해 아내에게 무시당하는 태현님에게, 이혼은 아이에게 아무리 노력해도 넘지 못할 배경을 태현님 손으로 만들어주는 것처럼 생각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다시 ‘위플래쉬’로 돌아오면, 마지막 장면에서 앤드류는 결국 플레처의 인정을 얻어냅니다. 앤드류의 신들린 연주를 들으며 플레처는 미소를 짓습니다. 하지만 황홀경의 연주가 이어질수록 관객의 마음은 오히려 혼란스러워집니다. ‘앤드류를 저런 예술적 경지에 도달하게 했으니 플레처가 옳았던 건가?’, ‘저 경지에 오르면 정말 앤드류가 잃어버린 것들이 다 보상되나?’ 하는 질문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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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을 지키려는 태현님의 절실함을 이해하지만 사연을 읽은 끝에도 비슷한 질문이 남습니다. 아내가 태현님의 희생과 인내를 알아주고 좋은 남편이라고 인정해주면, 그래서 아이가 한부모 가정에서 자라지 않으면, 그동안 짓밟히고 상처받은 시간도 다 괜찮아질까요? 원하는 결말이 그간의 고통을 다 보상해주지 못할 때 태현님을 덮칠 분노와 허무, 혼란은 어쩌면 더 클지도 모릅니다. 지금 필요한 건 태현님을 더 갈아 넣는 것보다 가정을 지키는 대신 무엇을 잃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것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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