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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November 1, 2026

‘고려 말 건진법사’ 염승익의 부적 디자인…불교미술에 남긴 뜻밖의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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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경북 구미 대둔사 건칠아미타여래 좌상(국가지정 보물)의 몸체 속에서 발견된 복장유물 중 하나인 ‘보협인다라니·만다라’. 8개의 잎 무늬가 37존의 만다라 무늬와 결합한 도상이 특징이다. 1295년 연대와 염승익의 이름이 원 둘레에 쓰여 이 도상을 제작·배포하는 데 염승익이 관여했음을 일러준다. 국가유산청 제공
최근 경북 구미 대둔사 건칠아미타여래 좌상(국가지정 보물)의 몸체 속에서 발견된 복장유물 중 하나인 ‘보협인다라니·만다라’. 8개의 잎 무늬가 37존의 만다라 무늬와 결합한 도상이 특징이다. 1295년 연대와 염승익의 이름이 원 둘레에 쓰여 이 도상을 제작·배포하는 데 염승익이 관여했음을 일러준다. 국가유산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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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전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와 얽힌 무속인 건진법사의 이권 청탁 의혹이 뉴스에 계속 오르내린다. 주술에 기대어 정치권력에 접근하며 영향력을 행사한 이는 과거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13세기 고려 후기 충렬왕의 병을 주술로 고쳤다는 영험을 내세워 조정의 재상 자리까지 올랐던 염승익(?~1302)이다.

고려왕조의 역사서 ‘고려사’를 보면 염승익은 명문가 출신의 인재였다. 젊은 시절 몹쓸 병에 걸렸으나 승려들의 신비스런 주문을 외운 덕분에 치유되면서 푸닥거리로 병마를 물리치는 주술사를 업으로 삼게 됐다고 전해진다. 이후 왕실에 접근해 충렬왕과 원나라 황제 쿠빌라이 칸의 딸이었던 왕비 제국대장공주 앞에서 건강과 장수를 비는 불교 주문을 염송하면서 손바닥을 뚫고 줄을 꿰는 고행을 벌여 환심을 샀다. 주술은 그의 확고한 정치적 자산이자 출세 수단이었다.

불교미술사학자 임영애 동국대 교수(문화유산학과)가 최근 염승익의 주술과 미술사·의학사의 관계를 짚어 발표한 2건의 논문은 이런 맥락에서 흥미롭게 다가온다. 2024년 12월과 올해 6월 학술잡지 ‘의사학’과 ‘불교학연구’에 각각 발표한 ‘고려 후기 염승익의 보협인다라니·만다라 제작과 주술 치유’, ‘염승익 발원 불교미술과 예념미타도량참법’이란 논문이다. 임 교수는 두 논문에서 염승익을 기이한 주술사나 무속인으로 다루는 데 그치지 않고, 1292년 그가 만든 주술 도상 부적인 ‘보협인다라니·만다라’와 불가의 참회의식을 담은 의례서 ‘예념미타도량참법’을 심층 분석했다. 이를 통해 염승익이 치유와 구복 욕망을 반영한 불교미술 형식을 새롭게 만들어 유행시킨 과정과 여기에 얽힌 종교사적 맥락을 추정해 밝혀놓았다. 염승익은 재기가 번뜩이는 불교주술 디자이너였다. 당대 고려인들 사이에서 보기만 해도 병이 낫는다는 믿음이 퍼졌던 경전 ‘보협인경’의 말미에서 범자(고대 인도문자)로 된 주술문 ‘보협인다라니’만 끄집어내어 다른 벽사 진언들을 덧붙이고 우주 질서를 표상한 원형 그림 ‘만다라’까지 결합시켜 새롭고 강렬한 신종 부적 이미지를 만들었다. 화면 한가운데는 8개 꽃잎들로 둘레를 두른 ‘만다라’ 도상이 있고, 그 도상 안에 생명의 탄생을 상징하는 불보살들을 복잡한 형상들이 아닌 간략한 범자 명칭들로 대신 채웠다. 8개 꽃잎들의 바깥 둘레는 고려인들이 염송했던 ‘보협인다라니’의 범자 주술문을 4줄로 구성해 겹겹이 감쌌다. 질병 치료와 장수, 극락왕생이란 인간 염원을 담은 상징물을 원 그림 안에 뭉뚱그려 넣고 압축하는 방식으로 당대 신앙예술 양식을 대중적 편의에 맞게 혁신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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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협인다라니·만다라’(이하 다라니·만다라)로 명명된 염승익의 부적 디자인은 1292년 첫 판본이 나오자 고려판 ‘대박 굿즈’라 할 만큼 선풍을 일으키면서 사찰과 불자들 사이에 널리 퍼져나갔다. 기존 다라니 주술신앙은 거대 불탑을 세우거나 두꺼운 경전 전체를 탑에 봉안하면서 진행했기에 경제적 부담이 컸다. 염승익이 창안한 다라니·만다라는 전혀 달랐다. 경전 문구, 만다라의 일부 핵심만 둥근 원 그림 안에 모아 압축시켰기에 작은 크기로 대량으로 찍어낼 수 있었다. 갖고 다니는 휴대용 주술 용구로 활용할 수 있고, 불상 몸체 안에 넣는 복장예물로도 안성맞춤이었다. 실제로 염승익은 국가기관을 동원해 다라니·만다라를 목판에 새기고 대량 인쇄해 각지의 절과 지인들에게 뿌렸다. 목판 가장자리에는 제작자, 제작 장소, 제작 시기 등을 명기했고, 자신의 이름까지 새겨넣어 도상의 신뢰도를 높였다.

1466년 세조 왕실이 발원한 강원도 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 내부에서 발견된 비단 저고리. 염승익 주도로 1292년 처음 간행한 ‘다라니·만다라’의 문양이 찍혀 있어 염승익의 부적 디자인이 조선시대에도 계속 유행했음을 보여준다. 임영애 교수 제공
1466년 세조 왕실이 발원한 강원도 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 내부에서 발견된 비단 저고리. 염승익 주도로 1292년 처음 간행한 ‘다라니·만다라’의 문양이 찍혀 있어 염승익의 부적 디자인이 조선시대에도 계속 유행했음을 보여준다. 임영애 교수 제공

당대 불교 주술부적의 표준으로 확립된 1292년 판본은 사찰은 물론 유력 가문 불사에도 널리 쓰이며 전승됐다. 경 구미 대둔사 건칠아미타여래상(1295)과 충남 청양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상(1346) 같은 고려 후기 주요 불상의 몸체 속 복장물을 최근 꺼내보니 이 판본이 어김없이 수십장씩 들어간 것으로 밝혀져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 뒤 조선왕조의 숭유억불 정책 속에서도 이 부적 판본은 뿌리 깊은 구복 왕생신앙에 힘입어 조선 후기까지 불상 복장품으로 명맥을 이어나갔다. 1466년 세조가 발원한 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 안에서 나온 비단 저고리에도 1292년 판본 다라니·만다라가 찍혀 있다. 왕실조차 주술적 권위를 인정하고 썼을 만큼 이미지의 호소력이 뛰어났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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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승익은 부적을 창안하면서 사람들의 여러 욕망을 겨냥했다. 당장 병을 물리치고 싶고, 오래 살고 싶고, 죽은 뒤 극락 가고 싶다는 소망을 불교의 진언, 만다라의 시각적 형식으로 결합시켰다. 임 교수는 이런 간결성과 접근성이 다라니·만다라의 유행을 설명하는 중요한 요인이라고 봤다.

염승익이 재상 시절 수리에 관여하고 발원문을 넣은 개성 남계원 터 칠층 석탑의 일제강점기 풍경. 조선총독부의 조선고적도보에 나온 유리건판 사진이다. 석탑은 일제강점기 서울 경복궁 경내로 뜯어 옮겼다가 현재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정원에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염승익이 재상 시절 수리에 관여하고 발원문을 넣은 개성 남계원 터 칠층 석탑의 일제강점기 풍경. 조선총독부의 조선고적도보에 나온 유리건판 사진이다. 석탑은 일제강점기 서울 경복궁 경내로 뜯어 옮겼다가 현재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정원에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노주(老呪:늙은 주술사)’로도 불렸던 염승익의 행적은 후대 사관들의 지탄을 받았다. 주술로 얻은 권력을 남용해 백성의 토지를 빼앗고 지방 향리들을 동원해 호화 저택을 짓는가 하면, 통역사 출신으로 최고 관직에 오른 권신 조인규(1227~1308)와 사돈 관계를 맺으며 국정을 농단했기 때문이다. 왕명으로 개경에 있던 절 남계원의 칠층 석탑(국보) 수리 공사를 하면서 그 안에 자신과 가족의 복을 비는 발원문을 왕의 발원문 양식과 똑같이 만들어 집어넣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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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불교미술사 측면에서 그는 병 치유와 장생, 극락왕생의 갈망을 하나의 부적 상징물로 합쳐 주술신앙의 새로운 표현 방식을 창출한 ‘크리에이터’이기도 했다. 고려 사회에 널리 퍼졌던 다라니 신앙과 당대 사람들의 ‘힐링’ 욕망을 간파하고 특기할 만한 종교예술의 새 형식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역사 유산의 다면성을 보여주는 문제적 인물이 바로 주술사 염승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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